누나들은 나보다 참 고생을 많이 하며 자랐다. 그래서 그런지 누나들을 생각하거나 가끔 사는 얘기를 들어보면 서글픈 마음이 든다.
누나들도 시골에서 자랐고 그다지 넉넉하지 못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태어난 환경만 생각하면 나보다 먼저 어려운 환경을 몸서 겪어왔다. 내게 누나들은 나보다 먼저 비바람을 맞는 우산 같은 존재였다.
나는 운 좋게도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장학금도 받으면서 생활했는데, 누나들이 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장학제도가 그렇게 완비되지 못했던, 주머니가 가벼웠던 학생들이게 더욱 냉혹했던 시기였다.
큰누나와 작은 누나 모두 고등학생 때부터 아르바이트와 공부를 병행했고 대학교 가서도 늘 아르바이트를 달고 생활했다.
지금에야 최저시급도 오르고 해서 아르바이트를 하면 제법 목돈이 모이지만 그때만 해도 최저시급도 낮았고 어떤 곳은 최저시급만큼 주지도 않아 주말 내내 일해도 기껏해녀 25만원을 받는 정도였다.
물가가 지금보다 저렴했던 그때에도 그 돈으로 월세며 생활비를 나기에는 부족하였다. 젊고 차란했던 그 시절을 누나들은 낭만 없이 짙은 회색 기억으로 보내왔다.
그럼에도 종종 시골으로 올 때면 누나들은 과자며 빵을 하나씩 사들고 오곤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나를 생각해서 부족한 돈으로 사왔던 것이었다.
지금은 모두 저마다 자리를 잡고 가정을 이루며 살고 있다. 누나들은 예전의 생활습관 탓에 작은 것 하나 낭비하는 것 없이 알뜰하다. 휴지 하나에서부터 커피 믹스까지, 그 하나 허투루 보내는 경우가 없었으며 식당에 가서도 남은 음식은 늘 싸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 걸 보면 나름 고생했다는 나는 사실 어쩌면 굉장히 낭비 심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체면치레 한다고 음식을 싸가지도 않고 별생각 없이 편의점에서 과자며 마실 걸 시키곤 한다. 그 정도가 내 딴에는 알뜰한 것이고 하루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이라 생각했으니 말이다.
내가 만약 누나들처럼 대학생활을 보내왔다면 난 평생 세상을 원망했을 것 같다. 그러나 누나들은 굉장히 긍정적이고 여전히 활기찼다. 딱히 부모님을 원망하지고 않았고 어쩌면 급여도 그렇게 많지도 않음에도 그 나름대로 절약하며 집도 사고 가정도 일궜다. 누나들은 나보다 모든 면에서 훌룡했다.
여전히 내 마음에 걸리는 것은 신혼여행에서도 돈을 아낀다며 좋지 못한 호텔을 전전했다는 얘기였다. 누나들은 추억처럼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그 얘기를 듣는 나는 참 서글펐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지하철 안에는 한 젊은 모녀가 일본 여행 일로 티격태격 다투고 있다. 저 딸은 자기가 누리고 있는 게 얼마나 행복한 건지 알고는 있으려나.
누군가에게는 평생을 꿈꿔왔지만 이루지 못한 걸 퉁명스럽게 말하는 저 말투가 참 부러웠다. 왠지 우리 누나들이 앞치마를 메고 주말 저녁 호프집에서 서빙을 했던 모습이 비춰보여 마음이 더 아팠다.
우리 누나들도 그때 그 시절 조금은 더 퉁명스럽고 부모님께 어리광을 부렸으면 어땠을까, 조금은 더 철 없이 지냈더라면 어땠을까, 조금은 더 낭비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럴 여유가 조금이라도 더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서글픔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