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치동 키즈
여름철 휴가에, 팔자에도 없던 5성급 호텔에 가게 되었다.
서울에 위치한 그 호텔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필자 사비도 일부 들어갔지만, 우연찮게 추첨에 당첨되어 원가에 비해 매우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숙소와 마치 외국 리조트를 연상시키는 야외 수영장까지, 시골에서 논두렁을 옮기며 살아온 나로서는 상상하지 못했던 풍경이었다.
호텔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풍기는 묘한 절간 향 냄새는 밖과 안의 공간 차이를 확실히 느끼게 해주었다. 이런 고급스러운 환경에 들어서면, 어쩐지 열등감 때문인지, 양심 때문인지, 여러 가지 생각이 밀려든다.
숙소 통창 너머로 펼쳐진 한강 물줄기와 햇볕에 반짝이는 수면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런 호사를 누리면서도 마음 한켠은 불편했다.
“내가 과연 이런 호사를 누리고서도 천국에 갈 수 있을까?”
나는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한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 '부자 체험'을 하고 있는 셈이니, 스스로에게 너무 낯설고 죄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사랑하는 부모님은 땡볕에서 농사일을 하고 계실 텐데, 이렇게 호사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부모님뿐 아니라,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 식량이 부족해 기아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생각하니, 내가 누리는 이 사치가 괜히 죄송하게 느껴졌다. 이 호텔 숙박비로 누군가를 도울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반성도 들었다.
잠시 감상에 젖어 있다가, 호텔 로비를 거닐다 도서관에 들렀다. 거기에는 아이들도 제법 있었는데, 지나가며 슬쩍 보니 문제집을 풀고 있었다. 놀랍게도, 초등학교 2학년도 되지 않았을 것 같은 남자아이가 고등학생 수준의 함수 문제를 풀고 있었다.
과거 학생들 과외를 하며 수능도 준비해봤던 나로서는, 문제만 봐도 어느 학년 수준인지는 대충 감이 온다.
아마도 방학을 맞아 가족과 함께 호텔에 온 대치동 키즈일 테고, 낮에는 수영하고 놀고, 밤에는 공부하라는 부모의 권유가 있었을 것이다.
책상 맞은편 소파에서 책을 읽고 있는 40대 부부가 아마 그 아이의 부모일 것이다. 함께 공부를 지켜보고, 부모는 독서하는 모습을 통해 아이에게 학습 의욕을 북돋우는, 매우 모범적인 부모상으로 보였다.
대치동 키즈는 딱 보면 느낌이 온다. 대학생 시절 대치동 출신 친구들을 많이 봤고, 남을 관찰하는 습관이 있어서인지 어느 정도는 구분이 간다. 유달리 순하고 어딘가 순진해 보이는 얼굴, 살짝 그을린 피부는 시골에서 온 친구들 같기도 한데, 실상은 영어가 기본이고, 명문 외고나 자사고 출신이며, 어릴 적부터 5성급 호텔과 해외 유학은 기본 경험인 아이들이다.
그 아이들이 유달리 착해 보이는 이유는, 어릴 때부터 성실히 공부해왔고, 모범적인 부모 아래에서 자라며 세상과 일정한 경계를 지닌 채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나중에 내가 아이를 낳는다면, 저렇게 순수하게 키우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만, 동시에 너무 순진해서 현실에 부딪힐 때 괜찮을까 걱정도 된다.
하기야, 저 아이들은 어차피 우리 사회의 거친 현실에 직접 맞설 필요가 없는 계층일 테니, 그런 걱정은 그저 내 몫일 뿐이다. 내가 대학에서 만났던 많은 대치동 키즈는 정말 착하고 욕심도 없었으며, 심지어 본받을 점이 많은 친구들이었다. 차라리 마음이라도 나빴으면 덜 얄미웠을 텐데, 너무 착해서 더 얄미웠다. 그냥, 그랬다.
다음 날 아침, 조식을 먹으러 갔다. 내가 앉은 자리 맞은편에는 젊은 부부와 남편의 어머니로 보이는 분까지 세 분이 앉아 있었다. 남편은 마르고 키가 컸으며, 가디건에 안경을 쓰고 있었다. 피부에는 여드름 흔적이 남아 있었다. 딱 봐도 공부를 열심히 했던 사람이었다.
반면 아내는 상대적으로 화려한 인상이었고, 남편의 어머니는 단단한 인상에 강한 기가 느껴졌다.
좌석 배치에서도 그런 기운은 드러났다. 조식당에는 둥근 테이블과 소파 좌석, 일반 의자가 있었는데, 보통 어머니를 소파 쪽 안쪽에 앉히고 아들이 바깥쪽에 앉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가족은 아들이 안쪽, 어머니가 바깥쪽에 앉아 있었다. 자리는 관계를 말해준다.
아마 이 남자는 강한 어머니의 리더십 아래 과학고에 진학하고, 열심히 공부해 의사가 되었을 것이다. 이후 어머니가 소개해준 예쁜 여성과 결혼했겠지. 물론 내 추측일 뿐이지만, 어쩐지 맞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예전 대학 앞 카페에서 비슷한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갓 입학한 듯한 남자 신입생과 그의 어머니가 함께 앉아 있었는데, 어머니가 어떤 수업을 듣고 어떤 방식으로 공부해야 할지를 일일이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대학생이면 자기 생각도 좀 있어야 하지 않나’ 싶었고, 반항도 없이 그저 따르기만 하는 모습이 조금 안쓰러웠다.
아마 그런 아이가 자라서 저렇게 가족을 이루고 있는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그 남자는, 어머니 말을 잘 들어서 의사가 되었고, 예쁜 아내와 결혼했고, 주말에는 5성급 호텔에서 조식을 먹을 만큼의 삶을 살고 있다. 바깥자리에 앉은 어머니는 여전히 그를 지켜주는 존재로 남아 있었다.
사람마다 삶의 모습은 다르고, 무엇이 성공이고 의미 있는 인생인지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호텔에 머무는 동안 보인 그 가족의 모습은, 어느 정도 한국 사회의 ‘성공 서사’를 요약해 보여주는 것 같았다.
호텔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며 느낀 것은, 부모의 든든한 지원 아래 대치동 키즈가 자라고, 성실히 공부하며, 결국 좋은 직업과 가정을 이루는 과정이 하나의 패턴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물론, 모두가 주체적이지 않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더 주체적으로 자기 삶을 살아가는 친구들도 많이 봐왔다. 그저 내 눈에 비친 호텔의 모습이 그랬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반항 없는 삶을 사는 것이, 먼지 없고 해충 없는 온실 속에 사는 것처럼 안정적일 수는 있겠지만, 재미는 떨어지지 않을까 싶다. 반항도 하고, 실패도 하면서, 때론 부모 말도 안 듣고 제멋대로 살아보는 것이 청춘이고, 건강한 세대다.
어쩌면 부모들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부를 자녀에게 물려주고자 너무 철저하게 ‘정답’을 알려주는 사회가 된 건 아닐까?
유학, 7세 고시, 과고·외고 입학, 명문대 진학... 한국 사회에서 부와 지위를 유지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정해져 있다. 그것이 과연 건강한 사회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상류층 자녀들이 대부분 의사, 변호사 같은 직업에만 편중되는 현실도 이상하다. 사람마다 하고 싶은 일은 다를 수밖에 없는데, 왜 다들 같은 길만 가는 걸까? 그들 중에는 분명 세계적인 요리사, 가수, 운동선수의 재능을 가진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재능은 꽃피우지 못하고, 의사로서의 삶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왜 성공의 길이 정해져 있다고 믿는 것일까, 사회는 왜 아이들에게 실패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것일까, 상류층의 자녀는 왜 "다 똑같은 진로"로 수렴되는 것일까...
그런 점이, 조금은 안타까웠던 호텔에서의 관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