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와 박찬욱을 바라보며
제가 기르고 있는 비숑프리제 소금이에요. 아주 착하고 사랑스러운 녀석이에요.
보통 하나 이상의 분야에서 비범한 능력을 보이는 자를 천재라고 부른다. 세상에는 수많은 천재가 있다. 특히 무언가를 창작하는 분야에서 천재의 존재가 두드러진다. 분야를 막론하고 범인들이 닿지 못하는 수준에서 괄목할만한 창작물을 만드는 천재가 존재한다. 그러나 내 생각에, '천재'라고 일컬어지는 수많은 이들 사이에서 '극치'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두 단어 모두 비범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지만, 이 두 가지 군상은 서로가 분명히 구분되는 차이점이 존재한다.
천재는 범인이 범접하지 못하는 사고를 지닌다. 일반인이 지각 가능한 세계를 넘어선 4차원의 세계와 닿아있다. 천재는 창작물을 통해 자신의 축제에 범인을 초대한다. 그리고 그 연회장은 범인들이 보기에도 상당히 매력적이다. 이들의 세계는 감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한 눈에 보기에도 감각적이고 뇌쇄적이다. 어떤 논리적 사고로 접근하고자 하면 그 세계는 망가지게 된다. 천재가 만들어낸 세계의 구축 기반은 강력한 욕구이다. 근저적인 본능에서 비롯된 욕구를 오감으로 승화시켜 만들어낸 창작물은 많은 이들이 매료될만한 강렬한 힘을 지닌다.
영화감독으로 예를 들어보자. 박찬욱은 천재다. 그의 창작물은 현실 너머의 사유를 다룬다. 그는 기괴하고도 고혹적인 연출을 통해 관객들을 그의 세계로 초대한다. ‘올드보이’의 파격적인 캐릭터와 자주빛깔로 휘감긴 미장센들을 떠올려 보자. 이는 본능적으로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우리는 영화를 보며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하더라도 그의 영역에 기꺼이 초대되고자 한다. 그곳에서 관객은 그를 이해하기보다는 온전히 그의 세계를 즐긴다. 그만큼 박찬욱의 영화는 매력적이다. 내면의 짜릿한 감각을 핥는 그만의 표현은 현실 세계의 법칙과 논리로 파훼하려는 범인들의 시도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반면 극치는 범인들의 사고의 끝에 닿아있다. 세상의 삼라만상을 자신의 창작물에 통렬하게 담는다. 일반인이 지각 가능한 3차원의 세계를 하나의 틈도 없이 꽉 채워낸다. 극치의 창작물을 접한 대중들은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는다. 이는 우리의 인지영역 가장자리까지 칠해낸 집요함에 대한 놀라움의 반응이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현실세계를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 빼곡하게 담아버린 극치의 세심함은, 범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의 극단이기에 충분히 받아들이고 오롯이 감탄할 수 있다.
박찬욱의 반대급부에서, 봉준호는 극치다. 그의 창작물은 현실 그 자체를 다룬다. 치밀한 연출을 통해 관객들의 세계로 들어가 그들을 흔들어댄다. ‘기생충’에서 기택 가족의 처절한 계급투쟁의 서사는 우리네 삶을 넌지시 투영한 우화이다. 우리는 이를 지켜보며 이해하고자 집중하고 해석하고자 스며든다. 결국 관객들은 그에게 자신의 세계를 내어준다. 경험과 직관으로 받아들였던 현실의 규칙들을 그의 영화에 투영하며 공감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영화 속 인물이 된다. 이렇게 봉준호의 영화는 압도적이다. 현실의 모순을 담아내는 그의 표현은 경험의 세계를 자극하며 자연스레 감각의 영역까지 닿곤 한다.
혹자는 상품성 있는 작품과 작품성 있는 상품을 구분한다. 굳이 빗대자면 천재의 창조물은 전자에 가깝고, 극치의 창조물은 후자에 가깝다. 이들은 범인들에게 강렬한 자극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그 자극의 작용 방식에 있어서는 두 군상이 상이하다. 나 또한 한명의 범인으로써, 두 종류의 비범한 자들의 우열을 가리거나 옳고 그름을 판단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저 이러한 극단의 묘기들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다만 무언가 창작을 하고자 하는 사람으로써는, 천재와 극치의 방식 중 어떤 전략을 택해야 하는 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