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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출항

색을 바꾸며 살아간다

by 김군

우리는 때로 새출발의 황금빛 청사진을 꿈꾼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치열하고, 비정하고, 잔인하고, 매정하다. 물론 그 속에도 따뜻한 온기의 한 줄기쯤은 있다. 하지만 겨우 지쳐 쓰러지지 않을 정도의 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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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풍파를 겪으며 노쇠해진 늙은 선원은 늘 지쳐 있고 무기력하다. ‘어떻게 나의 바다를 건널까’보다 ‘어떻게 저 파도를 버틸까’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나 역시 그런 시간을 겪으며, 이전에 써 내려간 문장의 마침표를 찍고 다시 새로운 노트에 글을 쓰고 있다. 여전히 낯설고 이질적인 이 출발선은 벅차다. 이번 바다는 이전과는 달리 파도의 낙차가 크다. 종잡을 수 없고, 예측하기도 어렵다. 그 속에서 중심을 잡으려 애쓰다 보면 하얀 거품 아래로 빠져들었다가 허우적이기 일쑤다. 들숨과 날숨의 리듬이 어긋나면서 호흡이 흐트러진다. 그래서 온전한 나의 모습이 아닌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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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찬 공기를 가르며, 하루의 빛이 아직 도달하지 않은 길 위로 발을 뗀다. 무겁고 텁텁하게 몸을 짓누르던 더위조차 아직 눈을 뜨지 않은 시간이다. 뚜벅뚜벅, 한 걸음마다 남겨지는 삶의 흔적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걸 새삼 느낀다.

이윽고 발걸음을 멈춘 자리에서 잠깐 숨을 고른다. ‘오늘도 잘 버티자’는 다짐과 함께.이제 나의 입은 마냥 터진 밸브가 아니다. 조절이 가능해졌다. 귀는 열려 있지만, 말은 걸러 듣고 천천히 꺼내놓는다. 보고 느낀 그대로, 정의 내린 대로 말하는 것이 반드시 득이 되지 않는다는 걸 이제는 안다.


제법 익숙하게 표정을 조절하고, 때론 어색하지 않게 미소도 지을 수 있다. 이런 나 자신이 불쾌할 때도 있지만, 삶은 빛과 어둠이 그렇게 뚜렷하게 나뉘지 않는다. 혼재된 색들 속에 자신을 맞춰가야 한다. 마치 카멜레온이 색을 바꾸듯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마음에도 없는 넉살을 얹는다. 그렇게 오늘도, 나의 항해는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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