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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덕정 Apr 04. 2020

브라질에서 만난 길 위의 아이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구걸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길에서 구걸하는 이들을 볼 때의 감정은 서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마주치고 싶지 않고 우연히 보아도 못 본 척. 도움을 줄 것도 아니면서 마음은 불편하고. 저런 사람들이 세상에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다고, 다른 이들의 동정에 기대어야 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살고 있는 브라질에는 소위 말하는 거지, 걸인이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가장 흔하게는 길에 앉아 행인들의 호주머니 동전이 우연히라도 떨어지기 바라며 낡은 모자를 뒤집어놓은 사람들부터, 팔을 붙잡고 우리 아기가 배를 곪고 있다고 간청하는 엄마, 식당가에서 밥 먹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점심 한 끼만 사달라고 하는 젊은 남자, 빨간 불 신호에 서있는 차들에게 다가가 창문을 두드리며 도움을 청하는 그런 사람들을 하루에 열 명도 넘게 마주할 수 있다. 이런 광경 모두 한국인들에게 다소 낯선 것이긴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심란한 존재는 바로 구걸하는 아이들이다.








 작년 한 길거리 바에서 맥주를 마시던 때가 아직도 기억난다. 동행이 화장실에 간 사이, 들여다볼 핸드폰을 가져오지 않은 나는 그냥 주위를 둘러보며 시끌벅적한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고 그중 한 남자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한 12살쯤 되어 보이는 맨발의 남자아이였는데, 길가 노점에 앉은 모든 테이블의 손님들에게 구걸을 하고 있었다. 이제는 브라질에 몇 년 살아 이런 상황이 정말 익숙하지만 생각해보면 첫 번째로, 한국에서는 이렇게 밥 먹는 사람에게 다가가 돈을 달라고 하는 상황을 겪은 적도 본 적도 없다. 두 번째로, 심지어 아이가 그러고 있다. 그러나 브라질 2년 생활만에 이런 장면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날 보며, 사람은 역시 적응의 동물인가 싶어 쓴웃음이 났다.


 이제껏 항상 상파울루 거리를 잰걸음으로 다니다 보니 아무 생각 없었지만, 이 날은 그냥 그 남자아이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계적으로 돈 좀 달라는 제스처를 취하는 아이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저 애는 언제부터 저런 일을 시작해야 했을까, 신발은 정말 살 수 없어서 못 산 걸까, 많은 브라질 사람들에게 비판적 어조로 들은 것처럼, 살 수 있는 처지지만 굳이 사지 않고 더 ‘동정을 사려’ 하는 전략을 취하는 걸까.  


 전략이라는 단어를 떠올림과 동시에 어린아이가 구걸을 하는 상황을 꼬아서 보는 내게 가벼운 혐오감이 들었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보호기제로 이전에 겪은 기분 나쁜 일이 바로 떠올랐다.


 어느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날, 두 남자아이가 버스에 무단 승차하기 위해 어슬렁 거리고 있었다. 1차 시도에서 버스 기사에게 걸려 실패한 그들은 민망함인지 짜증인지 몰라도 근처에 서 있던 나에게 다가와서 아주 기분 나쁜 얼굴로 말을 걸었다. 느낌상은 그냥 모욕이거나 돈을 달란 소리였던 것 같다. 음악을 크게 듣고 있던 차라, 이어폰이 감사한 순간이었음과 동시에 셔츠 안으로 쥐고 있던 핸드폰을 더욱 안쪽으로 깊숙하게 집어넣었다. 고작 해봐야 10살짜리들인데 그렇게 가슴이 쿵쿵 떨리고 겁이 날 수가 없었다. 솔직히 이 둘이 나를 퍽치기하고 핸드폰을 들고 튀면 나는 절대 못 잡겠지. 나는 귀가 안 들리는 사람인 것처럼 그냥 먼 곳만 바라봤고 이 둘은 나에게 공격적으로 말을 걸다가 재미가 없었는지 옆 사람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했고 2차 시도에서 또 버스표 검사원에게 무단 승차를 들키자 버스에서 내린 후 열려있는 창문 틈으로 검사원의 머리 뒤통수를 세게 내려치고 도망치는 것이었다. 뭐 이 뿐 아니라, 예전에는 여자 아이들이 몰려다니며 사람들을 때리고 다니는 것을 목격하며 반대편으로 향하고 있었던 내가 하필 다시 마주친 그들에게 성희롱을 당한 적도 있다. 어이가 없어서 참. 초등학생 뻘 여자애들이 이렇게 불편할 일인가...


 이렇듯 순진해 보이는 아이들이 얼마나 기분 나쁘게, 무섭게 돌변할 수 있는지 몇 번 목격했기 때문에 단순히 긍정적으로, 인간적으로만 생각할 수 없다. 나의 의심은 타당한 것이다...라고 그렇게 빠르게 나를 보호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던 어느 여름날, 한 호텔 행사에 우연히 초대받아 양복을 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와인과 디저트를 즐기게 되었다. 어차피 내가 메인 게스트도 아닌 행사라 얼굴만 비춘 뒤 금방 호텔을 빠져오는 내게 직원이 참석자들을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빠네토네를 건네주었다. (Panettone - 브라질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시즌에 먹는 빵 케이크) 단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다 먹을 수 있을까 하면서 덜렁덜렁 한 손에 들고 집으로 돌아가던 그때, 길가 구석에 앉아있는 한 가족을 마주했다. 그리고 평소와 같이 불편한 마음에 지나쳐 얼른 한 블럭을 내려왔지만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 큰 빵을 가져가 몇 조각 먹고 버릴 거라면, 차라리 저 사람들에게 주는 게 이 빵이 주는 행복의 총합이 몇 배 이상 크지 않을까 , 사회문화 시간에 배웠던 벤담의 이론을 떠올리며 크리스마스인데 나도 좋은 일 한번 하자 싶어 그 가족에게로 향했다.



빠네토네 - 초콜릿이 들어간 부드러운 빵케이크.

 

아빠로 보이는 사람에게 '빠네토네 좋아하세요?'라고 묻자 아이들이 그거 우리 주는 것인가 싶어서 눈을 반짝였고, '그럼요'라는 대답에 호화롭게 포장된 호텔의 빠네토네를 건네주었다. 맛있게 드시라 말한 뒤 발걸음을 떼었고, 들리는 아이들의 신난 목소리와 그에 수반되는 얼굴 표정을 상상하면서 죄책감이 일순 일었다. 이왕 먹을 것 줄 거였으면, 마실 것도 하나 사서 줄걸 목 많이 막힐 텐데... 바로 옆에 편의점이 있었지만 그 정도의 적극성은 생겨나지 않았다.


 

 내 주위 브라질 사람들이 종종 내게 말했다. 저 사람들, 그냥 일도 하고 싶지 않고 그냥 타성에 젖어 저렇게만 살고 싶은 사람들이라고, 내가 도와주면 그 돈으로 마약이나 사기 때문에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라는 말까지 듣는다.


 그 누구도 길 위 각자의 사정을 알지 못한다. 난 이 충고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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