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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캡틴 제이 Oct 15. 2023

조족지혈입니다.

원어민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뻔한 단어인데도 무슨 의도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경우를 종종 마주한다. 이럴 때는 흐름을 깨지 않기 위해서 앞뒤 상황으로 유추하거나 어떤 경우는 결국 그날 대화에서 공백으로 남기고  지나가기도 한다.

1990년대 초에 대학을 다니던 때, 나는 영문학을 전공했는데, 우리 과에는 한국말을 아주 유창하게 하시던 원어민 교수님들이 몇 분 계셨다. 은퇴가 가까워 강의를 듣지는 못했지만 작고하신 서머빌교수님의 한국말은 한국인보다도 더 격이 있고 유창하셨다. 성이 무엇인지 물으시고는 어떤 파인지까지도 궁금해하실 만큼 한국인보다 한국인의 역사에 정통하셨다.


더불어 이제는 그 이름조차 가물거리지만 다른 한분 교수님은 한국인 여성과 결혼하고 한국에 정착한 지 오래되어서인지 한국말 억양까지 거의 완벽해서 전화통화를 하면 이분이 미국분이라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할 경지였다.


종종 영자신문사의 기사 교정을 위해 사무실을 방문했는데 하루는 어디선가 걸려온 전화에 한국말로 대화를 나누고 계셨다. 그러다 이분이 상대방 말을 잘 이해 못 하셨는지 또랑 또랑한 한국말로


"지금, 한국 사람 아니라 외국사람하고 대화하고 있으니까 좀 천천히 얘기해 줘요."


이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내가 나중에 전화 통화를 마친 교수님께


"교수님 한국말 실력이 정말 대단하세요. 전혀 외국인이라고 상대방이 알아차리지 못할 것 같아요."


이 말에 머쓱한 웃음을 웃던 그분이

이 말은 또 어떻게 배우신 건지..

"조족지혈입니다."


지금도 나는 30년 전 이 교수님이 도달했던 한국어 실력만큼 나의 영어실력을 키우지 못한 것 같아 부끄럽고 안타깝다.


원어민 크루 누군가가 만약,


"기장님 정말 영어 잘하세요!"라고 칭찬을 한다면 그때 나는


"You are flattering me, I barely made a scratch."


이 정도로 얘기를 하면 한국말의 그때 그  '조족지혈'의 느낌이 들까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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