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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늘 Jun 11. 2022

피에로

마늘단편 - 맛없는 맛집 소설






 비는 해가 바로 지기 전부터 내리기 시작했다. 한 시간을 걸어도 옷이 살짝살짝 적을 정도의 가랑비였고 그나 나나 둘 다 비 맞는 것을 좋아했기에 우리는 주적주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부다페스트의 세체니 다리와 부다페스트 왕궁을 한 시간 정도 걸었다. 그와 나는 일 년에 한 번, 많으면 두 번 정도 이곳 부다페스트에 온다. 부다페스트에 오면 보통 2-3일 정도 머무르는데 이곳에 머물 때는 보통 오전 내내 자고 늦은 밤까지 근처 바와 클럽들을 다니며 술을 마셨다. 어느 바를 가던 그는 가벼운 맥주로 시작해 스피릿을 거쳐 블러드 메리로 마무리를 했고, 나는 바의 분위기에 맞춰 가벼운 칵테일을 마셨다. 그렇게 벌써 삼 년을 보냈고 언제나처럼 오늘도 어부의 요새 근처에 있는 피에로의 문을 열었다. 부다페스트에 오기 전에 우리는 미리 피에로의 창가 자리를 예약해 두었고 그 자리는 저녁시간에는 근사하게 턱시도를 차려입은 연주자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바로 그 앞자리였다. 삼 년 전 우리가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 우리는 이 자리가 무척 탐났었고 그래서 이듬해부터는 부다페스트에 오기 오래 전부터 미리 이 자리를 예약해두었다. 삼 년째 변함없이 같은 슈트를 입고 있는 매니저 한스는 (이번에 향수는 우드 향이 살짝 더 강한 향수로 바뀌었다) 우리를 미소로 반기고는 예약 명단을 한 번 더 체크한 후 자리를 안내해주었다. 우리는 젖은 코트와 재킷을 한스에게 맡겼고 한스는 옷을 가지고 금세 우리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그는 오늘따라 말이 없었다. 꽤 오랜 시간을 우리는 그저 말없이 걸었던 것 같다. 잠시 후 처음 보는 웨이터가 우리의 자리로 와서 미지근한 물을 따라 주었다. 레몬이나 그 외 첨가물이라고는 전혀 없는 물이었다. 물을 한 잔 마시며 그는 내게 물었다. 

“뭘로 한 잔 할까?”

“글세, 뭐 늘 그렇듯... 편하게 보틀로 한 병 마실까? 추천받는 게 어때?”

그는 조용히 고개를 웨이터 쪽으로 돌려 웨이터에게 와인을 추천받았다. 잠시 후 웨이터는 깔끔한 라벨의 레드와인 한 병을 가져왔다. 짧은 영어로 무언가를 설명했고 영어를 잘 모르는 나는 그냥 웨이터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잠시 후 그 와인에 대해서는 그가 설명해 주리라. 설명을 마친 웨이터는 숙제를 마친 어린아이 표정으로 능숙하게 와인을 오픈해 우리 둘의 잔에 와인을 채웠다. 메뉴를 지금 주문하겠냐는 웨이터의 말에 그는 나를 봤고 나는 귀찮지 않게 저녁 세트 메뉴를 주문하자고 말했다. 그는 웨이터에게 그 말을 전달했고 웨이터는 우리의 얼굴을 양쪽으로 번갈아 보며 미소를 짓고를 자리를 떠났다. 나는 잔에 채워진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마음에 드는 온도의 와인. 살짝 텁텁한 맛이 느껴져서 조금 더 두었다가 마시기로 한다. 그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한 모금을 마시고는 잔을 내려놓고는 더 잔으로 손을 가져가지 않는다. 오늘은 정말 그가 조용하다. 그와 연애하며 처음 느껴보는 고요한 밤이다. 

"당신, 혹시... 행복 질량 보존의 법칙이라고 들어봤어?"

그가 긴 정막을 깨고 나에게 물었다.

"글쎄. 그게 뭐야?"

"꽤 심플해. 누군가 행복하다면, 누군가는 불행하다는 거지."

그는 정말 진지한 표정으로 내 눈을 보고 말했다. 그의 이런 진지한 모습도 오래간만이었는데 오랜 침묵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지 아니면 그가 정말로 진지해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말? 에이, 설마. 행복이 물질도 아니고... "

나의 가벼운 반문에 그는,

"사실... 당신과 연애하며 늘 생각했다구. 나,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건지."

그의 별거 아닌 한마디에 내 기분은 좋아졌다. 하지만 워낙 엉뚱한 그였기에 금세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내가 이렇게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당신과 연애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행해지고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봤어. 심지어 당신도, 당신조차도 행복한 게 아니라 엄청 불행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구."      

'응, 이건 무슨 소리지.'

그가 꽤 엉뚱하고 이상한 데다 궤변론자이긴 해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나에 관련된 이야기를 한 건 처음이었다.   

"나와 연애하기 전 당신이 나와 그 친구 사이에서 누굴 선택해야 할지 고민했던 그 친구 말이야. 그 친구는 내가 당신과 연애함으로써 엄청 불행해졌다구. 그리고 당신이 전에 이야기했던, 그 말이야 작년에... 그 장례식장에서 우연히 만나 한 잔 하고 나와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하던 그 사내도 꽤 오랜 시간 당신한테 주섬주섬 연락했더랬지. 그 사내도 그 시간, 혹은 그 이후의 시간이 얼마나 불행했을까."      

"아니, 당신. 대체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거야. 갑자기? 하고 싶은 말이라면 빙빙 돌려대지 말고 바로 이야기해줬으면 좋겠는데?"      

마침 멋지게 턱시도를 차려입은 피아노 연주자는 eliane elias의 just enough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허비 행콕과 함께 해서 더 인상적이었던 곡으로 나보다는 그가 더 즐겨 듣던 음악이다.      

"그래, 당신도 불행했을 거야. 나 같은 사람을 만나 연애하느라 얼마나 불행했을까. 당신 주변에 얼마나 멋지고 잘난 사람들이 많은데 말이야. 왜 하필 나냐고. 그러고 보면... 나만 불행해지면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데 말이야. "      

나는 이제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더 이상 듣고 싶지도 않았다. 갑자기 술이 생각나서 앞에 있는 와인 잔의 와인을 단번에 모두 들이켜 마셔버렸다. 그는 내 그런 모습을 보고도 내 와인 잔을 채워주지 않았고 나는 내 손으로 테이블 위의 와인을 집어 잔에 가득 채웠다. 그리고 바로 두세 모금을 다시 털어 넣었다. 

"그래. 나는 지금 당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어서 무척 불행해졌어. 지금 내가 불행해졌으니 당신, 혹은 누군가는 행복해진 거겠지? 맞아? 이런 거야?"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해도 그는 듣고 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예상했던 대로 그는 내 이야기는 무시하고 그의 말을 이었다.

"나는 피에로야. 사실 내가 계속 광대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게 모두에게 행복할지 몰라. 나 홀로 외롭고 늘 우울하고 금세라도 손목을 그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불행한 상황이지만, 그 누구에게도 피해 주지 않고 홀로 웃고 있는 가면을 쓰고 계속 유머러스한 춤을 추는 거지. 그러면 나만 빼고 이 세상의 모두가 행복하게 살게 되는 거야."  

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주적주적 내리던 비가 방울이 굵어져서 세차게 내린다. 우산도 없이 저런 비 안으로 들어간다면 속옷까지 금세 젖고 말게 될 것이다. 나는 조금도 슬프지 않았다. 나는 조금도 불행하지 않다. 내가 불행함으로써 그를 행복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행복했고 그래서 다시 앞에 있는 와인 잔의 와인을 모두 마신다. 때마침 애피타이저를 서브하러 온 웨이터가 그 대신 나의 와인잔에 와인을 채워주었고 나는 세찬 빗소리와  eliane elias의 just enough를 동시에 듣는다. 나는 이 시간이 무척 행복했고 그래서 이 시간이 영원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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