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리몰리 인도델리
우리 집의 거실에 십 년이 훌쩍 넘은 오래된 삼익 피아노가 놓여있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피아노 칠 줄 알아?"
"전혀.. 딸과 와이프만 가능하고 난 아니야."
"예전 인도에는 집집마다 피아노를 두는 것이 유행인 적이 있어서 거의 모든 집에 피아노가 있었는데, 이 집주인이 가지고 있던 피아노야? 가구까지 모두 렌트하지 않았나?"
"아니, 그냥 하나 장만했어. 중고로.. 와이프랑 딸이 심심할 것 같아서 말이지..."
아제이의 말은 믿기 어려웠다. 집집마다 피아노를 가지고 있었다니... 지금의 인도를 보면 상상이 안된다. 인도에서 피아노는 구하기도 어렵고 가격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굉장히 높다. 10년이 훨씬 넘은 중고 피아노도 상태에 따라 다르지만 그래도 200만 원에서 300만 원에 거래된다.
인도의 피아노 문화는 영국 국왕이 인도 황제를 겸임하던 British Raj_인도제국 시절에 들어온 풍습이라고 했다. 듣고 보니 그럴듯한 설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업혁명 이후의 유럽은 브르주아가 부와 권력을 획득하였고 기존의 귀족과 왕들의 전유물과 같았던 예술을 지탱하는 신흥 계층으로 부상한 시대였다. 특히, 당시에는 쇼팽의 피아노로 더 잘 알려진 플레엘 피아노와 같은 발전된 형태의 피아노도 생산되고 있었다. 지금의 업라이트 피아노 디자인은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고 있었으며 1851년 기준 전 세계 피아노 생산량은 대략 연간 50,000대에 불과했고 절반 정도는 영국에서 생산되고 있었다. 가격은 당시 화폐로 약 100 기니_guineas로 학교 선생님의 1년 치 연봉 정도에 해당하는 고가였다. (The Piano - A Histpry by Cyril Ehrlich 1976 J. M. Dent & Sons Ltd) 희귀성을 가진 고가 제품인 피아노는 브르주아들의 수집품이 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런 시간들이 쌓여가면서 피아노는 브르주아 문화의 상징이 되었으며, 음악은 그들의 교양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었다. 특히, 피아노 연주를 할 수 있는 여성은 교양이 있는 집안의 여성이라는 공식이 성립되면서 브르주아 계층의 여성들에게 있어서 피아노 연주는 결혼을 하기 위한 필수조건이 되었다. 이런 분위기와 문화가 인도로도 옮겨갔던 모양이다. 사실 조선 또한 일본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없고, 특히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들이 솔선수범하여 상투를 자르고 연미복을 입는 것이 근대화의 척도로 이해된 시기가 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는 된다.
"그렇다면, 아제이, 너도 피아노 칠 줄 알아?"
"노노, 난 카스트가 바이샤고 전문 장사꾼에게 연주 할 피아노는 필요 없어. 팔 수 있는 피아노가 아니면 관심이 없지. 나한테는 숫자만 필요하다고.. ㅋㅋ"
"그래도 영국이 음악이라는 문물은 전해 주었구먼 그래.."
"글쎄, 영국이 인도에 준 것은 음악이라기보다는 영어와 크리켓이지. 인도에 영어가 없었으면 지금쯤 나라가 아닐지도 모르고, 크리켓이 없었으면 인도대륙의 사람들이 하나로 뭉칠 수 없었을 거야 ㅋㅋ"
'그런가... 비슷한 섬나라인 영국과 일본이 인도와 한국과 같은 대륙인들에게 한 일이 사뭇 달라 보이네..."
아제이를 포함해서 지금의 인도 사람들과 피아노는 잘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피아노 가격도 가격이려니와 인도인들이 좋아하는 음악 중에 피아노를 비롯한 소위 클래식 음악은 우선순위에서 한참 아래에 놓여있다. 음악과 노래를 엄청나게 좋아하는 인도인들이지만 주로 소비되는 음악은 볼리우드_Bollywood 영화로 대표되는 인도 영화에 포함되어 있는 노래들이다. 사실 영화 자체의 스토리보다는 그 영화에 나오는 노래와 음악이 더 중요한 인도인들이어서, 영화 제작사들 조차 극장 스크린에 영화를 내걸기 전에 노래에 대한 반응을 먼저 보고 영화 상영 여부를 결정한다. 인도의 영화 산업은 대략 2007년을 기점으로 바뀐 것 같고 음악도 그 전의 인도 음악과 많이 달라졌다고 느껴지는데, 특히 영화 'Om Shanti Om'은 인도 영화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외국인들이 봐도 충분히 공감이 되는 사랑과 운명, 불굴의 의지와 권선징악적인 재미있는 요소들도 꽤 다양해서 마살라 무비_Massala Movie라고 불린다. 향신료가 듬뿍 들어간 영화라는 의미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 이전의 인도 영화는 대개 한 가지 인도식 카레 향만 넘쳐났다. 그래도 인도인들은 자기들의 소리를 좋아한다.
어렸을 때 엄마가 피아노 학원에 보내려고 하면 남자가 무슨 피아노를 치냐며 도망 다녔는데, 나만 그랬다기보다는 그때는 대개 그런 분위기였다. 음악이나 악기를 배우는 것은 엄청난 재능이 있거나 집이 부자이어야 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 지난 삶에서 후회가 되는 일이 몇 가지 있지만, 피아노 학원에 안 가려고 도망 다닌 것이 가장 후회되는 일이다. 학원을 다녔으면 최소한 음악적 소양은 조금 남았을 것인데, 그러한 기본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음악을 온전히 이해하고 즐기기 어렵다. 당연히, 나에게 소위 클래식 음악이라는 것은 그저 <좋은 소리>가 나기 때문에 듣는 것이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간혹 어떤 연주회에 대한 평을 써놓은 글들을 읽으면 과연 좋은 소리를 만들어 내는 이유가 있는 듯한데, 스스로 그런 설명을 하지 못하고 내 마음대로 감상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저 <좋은 소리>를 들었기에 정신이 조금 더 올바르게 자리 잡았다 위안할 뿐. 좋은 소리를 듣고 나쁜 마음을 가지기는 어렵다. 우리의 세종 대왕이 편경의 소리를 바로잡아 나라의 좋은 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달래고 교화하려 한 것만 봐도 좋은 음악이 비록 시대를 이끌거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해도,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정신을 조금 더 높은 곳으로 인도하여 보다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데 유용하게 쓰일 수는 있겠다.
반면에, 같은 음악이라도 목적에 따라 완전히 다른 세상을 만드는데 이용되기도 한다. 특히 독재자들은 정치적으로 음악을 사용하는데 천재적인데, 어떤 이유로든 사람들이 독재자의 의도를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려는 의지를 잃었을 경우다. 히틀러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공격 대상이 되는 도시에 하루 먼저 보내 음악회를 개최하여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공연은 공포의 시작이 되었다. 현재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위상을 생각하면 상상하기 어렵지만 사실이며, 나치는 더 나아가 세계적으로 명망이 높은 음악가를 나치 정부의 음악 총책임으로 임명함으로써 나치가 전쟁광이 아닌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문명 정부라는 것을 홍보했다. 하지만 동시에 괴벨스와 같은 나치의 선동자들은 특수 부대까지 편성하여 자신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유럽 전체를 대상으로 예술품과 고가의 악기를 약탈하고 있었다.
이렇게 특정한 이데올로기가 광적으로 몸부림치는 시대에서 사람들은 살기 위해, 또는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독재자들이 그들을 이용하도록 내버려 두기도 한다. 빌헬름 푸르트 뱅글러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의 자리를 지키면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유대인 오케스트라 단원을 보호했으며 그러기 위해 히틀러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역시 독재 이데올로기의 선전 목적을 위해 나치 정부의 예술 총감독으로 임명되었고, 나치에 부역함으로써 유대인인 며느리와 손자들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코리아 환상곡의 작곡자인 안익태는 그들만큼 알려진 음악가는 아니었으나 라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 인정받는 작곡가였고 그의 초청으로 베를린을 방문했으며, 독일과 함께 추축국의 하나였던 일본 국적자로서 일본 황제를 위한 음악을 지휘해야 했다. 프루트 뱅글러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모두 전후 나치 부역자로 낙인찍혀 나치전범재판에 회부되는 등 오랜 고초를 겪었으나 결국 모두 무죄 선고를 받았다. 안익태에 대한 내용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탓인지, 한국 사람들이 먹고살기 바빠 음악 따위는 그리 신경을 쓰지 못한 탓인지 해방 후에도 별 말이 없었지만, 최근 그가 베를린의 나치 깃발과 일장기 아래에서 지휘하는 영상을 찾아낸 자들에 의해 모욕을 당하는 중이다. 동아일보와 고려대학교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 역시 매일신보와 춘추 등의 언론 매체를 통해 징병과 학병 참여를 선동하는 글을 써 친일 했다는 이유로 건국훈장은 취소되고 반민족친일행위자 명단에 등재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이들의 실체를 제대로 알 수 있는가? 조선인 모두가 유관순 열사가 되어야 했다면 조선인은 씨가 말랐을지도 모른다. 친일 하는 글 한 번으로 조선의 언론사와 조선인 교육을 위한 학교 하나를 남길 수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하나의 실체를 이루는 수많은 사실들이 있을 수 있음에도 단 하나의 사실이 그것을 포함한 전체의 현실이나 진실이 되어버려서는 안된다. 조금 더 극단적으로 미군 부대 근처에서 양공주라는 비아냥을 받던 여성이 그런 비난을 기꺼이 받으며 자식을 소위 SKY 대학까지 보내어 훌륭하게 성장시켰다고 가정해 볼 때, 그 자식은 자기를 키워주고 먹여준 그 양공주 어머니를 돌로 쳐야 하는가?
불편하다하여 우리 스스로 만들어 놓은 법과 규율을 제쳐두고 정의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상하기만한 이데올로기들이 판치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도 슬픈 일이나, 사람들 스스로 생각할 힘을 잃게 되면 나치와 같은 가짜 이데올로기가 사람을 먹어 치울 뿐이다. 지금의 한국 사회가 조금 이상해 보이는 이유이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좋은 소리>를 들어볼 필요가 있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