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로망스
청계천 로망스라는 제목으로 글을 시작한 지 9년이 되었다. 사람들 중에는 역사학이나 인문학, 또는 향토학에 대한 학위는 고사하고 전문 지식도 없는 자가 이런 글을 왜 쓰는지에 대해 궁금해하는 자들도 있었고, 이 글의 등장인물인 데이비드와 필립, 이안이 모두 실제 인물들인지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두 실제 인물들이고 그들의 대화 내용 또한 소설처럼 지어낸 것이 아니다. 다만 스토리의 연결을 위해 시점과 화자에 대해 약간의 수정이 가해졌고, 데이비드를 제외하고 필립과 이안은 가명이다. 그리고 나는 글 속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이들이 있던 장소 모두에 함께했다. 이 일을 시작하게 된 이유 또한 복잡하지 않다.
이 일을 시작할 당시에는 신문이나 TV 방송조차 개인 방송과 소셜미디어들이 쏟아내는 온갖 정보에 파묻힐 지경이 될 정도로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고 인문학에 관한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넘쳐나기 시작했으며 나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은 그런 정보를 단순히 소비하고 있었다. 어떤 것이 진짜인지 구별이 힘들 정도로 쏟아지는 정보와 뉴스, 그리고 매일 새롭게 등장하는 신기술과 용어들에 적응이 어려운 시대에서 어제까지 알던 나의 지식은 더 이상 지식이 아닌 것 같아 보였다. 젊은 세대들의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전달해 주기도 불가능해 보였는데, 글로벌라이제이션이라는 것이 시작된 지 수 십 년이 지나자 회사에서도 주변에는 외국인들이 앉아 있었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지켜본 그들은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그리 뛰어난 인재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또래의 한국 젊은이들의 소위 스펙은 훨씬 좋았고 경험도 많았다. 그들은 거의 만점에 가까운 토익 점수가 특별하지 않았고 들어보지도 못한 각종 자격증에 해외여행 경험도 많아 그들 나이에 내가 알던 세계보다 큰 세상을 이해하고 있었다. 나의 기준에서는 완전히 다른 고도화된 신인류이다. 이상한 것은 그들 스스로는 자신을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으며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한국의 환경을 헬조선이라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9년 전의 한국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문화적으로도 발전되어 있었지만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거부감 없이 인정되고 있었다.
현실이 이해는 되었지만 눈을 1도만 돌려 한국을 벗어나 보면 정작 "헬_Hell"이라는 단어를 붙어야 할 것 같은 나라와 사회는 너무도 많으며, 한국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궁금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지금 이런 모습으로 살고 있게 된 것일까? 앞으로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까라는 궁금증에서 모든 일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할지 애매하여 쉬운 것부터 시작을 하기로 한 것이 우리 동네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우리는 대화를 시작했고 책을 찾아 읽었으며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 정리도 했다. 도시를 걸으며 책의 내용을 확인해 가는 도중에 가장 즐거운 일은 밥과 술을 함께 하는 시간들이었다. 때로는 도시 밖으로 짧은 여행도 다녔다. 그런 시간 속에서 이야기하고 경험한 일들을 기록해 오다 보니 꽤 다양한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시리즈물과 같은 내용이 만들어졌다.
일을 하다 보니 멜로디와 리듬이 합쳐져야 비로소 우리가 느끼는 음악이 되듯이 우리의 모습은 우리가 살아온 동네와 그 동네에 대한 기억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울에서 살아온 우리 모두에게 가장 잘 알려진 곳 중의 하나는 청계천이었다. 한강과 같이 거대한 물줄기가 아니어서 오히려 수 백 년의 기억을 압축해 간직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청계천 위로 드리운 기억이 멜로디라면 그 아래를 쉼 없이 흘러가는 물소리는 리듬이 되어 한국 사람들만 느낄 수 있는 음악을 들려주고 있는 것 같았다. 명당수로 관리할 것인가를 두고 토론을 벌이던 조선의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의 기억과 물난리의 기억,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서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하며 다리를 건너 다니던 사람들의 기억, 복개와 개발의 기억, 일제 강점기에 그 위를 걷던 조심스러운 발걸음에 대한 기억을 넘어 이제 우리뿐만 이니라 전 세계 사람들까지 청계천을 찾아와 걷고 즐기는 문화 공간이 되었다.
청계천 로망스의 1부는 청계천을 중심으로 서울에 겹겹이 내려앉은 기억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어질 2부에서는 낮게 끊어지듯 끝내 말해지지 못한 채 물속에 남아 있는 사라진 이름들과 지명, 그리고 기억나지 않기를 강요받았던 일상들로 점철된 일제 강점기의 소리 없이 가라앉은 선율 속에서도 오히려 같은 리듬으로 흐름을 멈추지 않은 청계천이 남긴 선율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대화가 이어진다. 끊어지지 않는 리듬은 현재이며 선율은 과거가 되어 서로 겹쳐질 때 비로소 시간을 기억하고 우리의 모습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며 1부를 마친다.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1부는 쇼펭의 프렐류드 (Prelude) 작품번호 28의 24개 곡을 떠올리며 들어가는 글과 인터미션까지 포함한 24개의 글 묶음으로 엮었다. 장조와 단조가 반복되며 어디선가는 시작되지만 어디가 끝인지 굳이 묻지 않아도 되는, 마치 도시 한가운데를 흐르는 청계천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강으로 흘러 들어가기 전 도시의 모든 사연을 받아들이듯 이 프렐류드들은 완결되지 않음으로써 완성되었다 할 수 있어 모든 글을 다 읽지 않아도 좋고 순서에 얽매일 필요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