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라미 아파트 김주임입니다
집을 한 단어로 정의하자면 ‘꿈’이다. 평생에 걸쳐, 내 몸 하나 뉘일 장소를 마련하는 것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꿈의 장소를 아무 곳에나 마련하지 않는다. 기왕 집을 살 거라면, 높은 층의 넓고 주변 인프라가 좋은 집을 사고 싶은 법이다. 소위, ‘돈 좀 되는 집’.
대한민국에서 사람들이 주로 사는 주거형태를 꼽아보자면 역시 아파트인데, 내가 어릴 때는 5층짜리 아파트도 충분히 좋은 곳이었다. 하지만 이젠 10층 아니 20층도 넘는 고층 아파트는 흔하고, 아파트인데도 엘리베이터가 없는 곳은 보기 힘들다. 거실과 안방에만 햇빛이 들어오면 감지덕지이던 시절은 가고, 이젠 3bay 4bay라는 이름으로 모든 방에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비싼 아파트가 생기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억소리나는 꿈의 아파트가 생겼고, 사람들은 그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정말 별별 사람들이 다.
나를 포함한,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파트에 산다. 그리고 아파트에 사는 나는 아파트로 출근한다. 사람들이 아파트에 드나들기 쉽도록 차량 등록을 하는 것도, 시청을 비롯한 여러 공공기관에서 오는 공문을 접수하는 것도, 그 내용을 아파트에 공지하고 민원을 접수 받는 것도, 나름대로 답변을 하거나 담당자에게 전화를 돌려주는 것도 모두 내 일이다. 나는 동그라미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서무주임으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일하면서 거주민들의 간단한 민원부터 복잡한 민원까지, 내가 전화로 일을 처리하곤 하는데 그 사연은 듣고있자면 천차만별이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되나? 싶은 사소하고 은밀한 이야기부터 당황스러움에 나도 모르게 되묻게되는 일까지, 아파트에는 희로애락이 들어있다.
부모님의 부고 소식을 팩스로 보내고 전화를 받기 위해 뒤를 돌면, 36개월 미만 아이를 기르고 있어 한국전력에 감면혜택을 신고했다는 세상만사 사고팔고의 이야기가 관리사무소를 돈다. 어린 학생이 작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놀이터에서 놀다 주운 핀을 맡기고 가기도 하고, 허리 구부정한 어르신이 몇 천원을 주웠으니 주인을 찾아주라며 지폐를 갖다 주시기도 한다. 20층 넘는 곳에 사람이 갇혔으니 구해주라는 전화가 걸려오기도 한다.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로 결정된 게 마음에 안든다며 빳빳한 검지로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지르는 사람을 보자면, 그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관리사무소와 이 일이 싫다기보다는 어딘가 정겹다. 텅 빈 눈으로 잠만 자고 일어나 일을 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5분째 소리를 지르며 따지고 있는 주민을 보자면 약간 살맛 난다고 해야하나. 관리사무소에는 언제나 일이 터지기 때문이다. 하루에 한번, 혹은 때때로. 그 일에 짜증났다가도 결국은 웃음을 터트려버리고는 만다. 천 세대쯤 되는 아파트에서 관리사무소에 5분 10분이 넘어가게 통화를 하는 사람마저 있는 것을 보면 얼마나 외로웠을까 괜시리 마음이 안타까워 잘 들어주기도 한다.
사실 나는 내가 예전부터 조금 모났고, 특이하고, 유별난 사람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꼭 가시가 비죽비죽 튀어나온 검은 성게같이. 하지만 나는 관리사무소에서 온갖 사연과 상황을 마주하며 내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생각보다 무던한 사람이었고, 누군가에게 연민과 애정을 보여줄 수 있는 꽤 훌륭한 어른이었다는 것을.
나는 앞으로 동그라미 아파트에서 일어나는 일을 미주알고주알 모두에게 전할 예정이다.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의 이야기에 궁금해하면 좋겠다. 그리고 서로에게 조금만 더 배려있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윗집에 숟가락이 얼마나 있는지, 바깥양반이 잘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이야기해주고, 들어주면 좋겠다. 집으로 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인사를 주고받는 날이 많아지면 좋겠다. 인터넷에 어떤 기발한 방법으로 층간소음을 해결했는지를 찾아보기보단, 재밌고 귀여운 방법으로 해결한 이야기가 오가기를 바란다.
이런 아주 작은 배려도 1000개가 모이면 큰 배려가 되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