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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더슈탄트 Jan 23. 2024

[일본] 18. 에키벤을 먹으며 든 생각

 드디어 규슈로 넘어왔습니다. 홋카이도에서 시작해 혼슈를 횡단했고, 그 사이 시코쿠에도 잠시 들렸습니다. 이제 규슈에 왔으니, 일본의 네 개 섬을 모두 방문하게 됐습니다.


 긴 일본 일주를 하면서, 저는 주로 철도를 이용했습니다. 페리나 버스를 이용한 적도 있었지만, 철도만큼 편의성이 좋지는 못했습니다.


JR홋카이도의 특급열차


 일본의 교통망은 대부분 철도 위주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도시 간의 간선 교통은 물론, 시내 교통도 그렇습니다. 작은 도시도 노면전차를 갖춘 경우가 많습니다.


 철도 기술에서도 일본은 선진국입니다. 일본이 신칸센을 개통한 것이 1964년입니다. 세계 최초의 고속철도 시스템이었죠.


 일본 철도의 정시성도 우수합니다. 그간 수없이 철도를 탑승했지만, 간선 철도에서 5분 이상의 지연을 경험한 것은 딱 한 번뿐이었습니다. 촉박한 시간 안에 환승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걱정과 달리 환승할 열차를 놓친 적은 없었습니다.


 철도의 영업 노선도 길고 다양합니다. 일본 철도의 총길이는 30,000km 이상입니다. 프랑스나 브라질의 철도보다도 긴 노선이죠.


신칸센이 지나는 철도


 하지만 일본의 철도에도 여러 문제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비싼 요금이죠. 일본의 철도는 한국의 철도에 비해 훨씬 비쌉니다.


 구마모토에서 가고시마까지 가는 신칸센 요금은 6,540엔입니다. 한화로 약 59,000원이죠. 이 구간의 거리는 170km 정도입니다.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 거리죠. 비슷한 거리를 가는 서울에서 대전까지의 KTX 요금은 23,700원입니다.


 더 큰 문제는 신칸센 외의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칸센이 설치된 구간에는, 원래 있던 보통열차 철도가 아예 사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에서는 같은 거리를 KTX로도 무궁화호로도 갈 수 있지만, 일본에서는 신칸센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버스 요금도 비슷하게 비쌉니다.


 물론 비싼 요금과 기존 구간의 폐지는 철도 회사의 이익을 위한 조치입니다. 고속철도를 운영하는 데에도 막대한 돈이 들어가고, 수요가 적어진 기존 노선을 운영하는 데에도 또 돈이 들어가니까요.


 한국의 고속철도라고 해서 이런 비용이 들어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한국의 철도는 공기업이 운영하고 있고, 일본의 철도는 오래전 민영화되었습니다. 그것이 만드는 차이는 큽니다.


JR큐슈의 신형 객차


 일본의 철도도 원래는 국가 소유였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경제 성장과 함께 도로를 이용한 수송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철도의 이익도 줄어들었죠. 1970년대 오일 쇼크 이후 불경기가 이어지자, 일본 정부는 철도 민영화를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일본 정부는 1982년부터 철도 구조 개혁을 본격적으로 검토했습니다. 1986년 7월 선거에서 자민당은 안정적인 다수를 확보했고,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는 철도 민영화를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1987년부터 본격적인 철도 민영화 작업이 시작됩니다. 기존의 일본국유철도(JNR)는 7개 회사로 나뉘었습니다. 홋카이도, 동일본, 도카이, 서일본, 시코쿠, 규슈의 철도가 지역별로 나뉘었고, 화물 수송을 담당하는 JR 화물은 또 따로 분리됐습니다.


 한동안 공기업 상태를 유지하던 7개 철도회사는 1993년 JR동일본을 시작으로 주식 매각에 돌입했습니다. 이제 각 철도 회사는 일본 정부의 손을 떠난 사기업으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이죠.


JR도카이 로고와 상징인 주황색을 쓴 히가시시즈오카 역명판


 물론 일본의 철도 민영화에 긍정적인 면도 있었습니다. 민영화 이전 국유철도가 가진 빚은 막대했습니다. 분사 직전인 1986년 일본국유철도의 경상 손실은 1조 4천억엔, 누적된 빚은 31조 엔에 달했습니다.


 현재 분사한 7개 회사 가운데 동일본, 도카이, 서일본, 규슈는 흑자 전환을 완료했습니다. 민간 기업이 된 각 회사는 철도뿐 아니라 다양한 사업에 진출했습니다. 철도역과 연계된 외식업이나 유통업 등을 통해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결국 막대한 적자를 극복하기에 이른 것이죠. 국가로서는 재정적 부담을 던 것입니다.


 일본은 국유철도의 민영화 이전부터 각지에서 민영 철도회사들이 영업하고 있었습니다. 사철(私鐵)을 사실상 찾아볼 수 없는 한국과는 대조적이죠. 그러니 국유철도가 민영화되었을 때도 엄청나게 큰 충격이 가해지진 않았습니다.


사철인 시마바라 철도


 하지만 민영화의 문제점도 뚜렷합니다. 특히 지역별로 회사를 분리해 민영화한 것은 불가피한 면도 있었지만, 분명 문제적이었습니다.


 인구 밀도가 높고, 신칸센을 비롯해 이익률이 높은 철도를 가진 지역의 철도회사는 금세 적자를 극복했습니다. 흑자를 낼 수 있는 회사였으니, 주식도 빨리 매각되었죠. 도쿄와 오사카를 잇는 도카이도 신칸센을 가진 JR도카이가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인구 밀도가 적고, 신칸센이 없던 회사는 적자를 면치 못했습니다. JR규슈는 한동안 적자 경영을 이어갔습니다. JR시코쿠와 JR홋카이도, JR화물은 지금까지도 적자 경영입니다. 당연히 주식도 매각되지 못하고 아직도 100% 정부가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익이 나는 구간은 민간에 매각되고, 손해가 되는 구간만 정부가 떠안는 꼴이 되었죠. JR규슈도 이제는 완전 민영화되었지만, 그 사이 정부는 3천억 엔 넘는 자금을 지원했습니다. 당연히 민영화된 JR규슈는 이 돈을 갚지 않았습니다. 채무가 아닌 지원이었으니까요. 3천억 엔을 그대로 민간 자본에 넘겨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다른 회사의 부채도 대부분 국가가 떠맡았습니다. 정부는 이를 토지와 주식 매각 등으로 해결하려 했지만, 버블 경제가 붕괴하며 계획은 수포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일본 정부는 담배에 특별소비세를 매겨 이 부채를 처리하고 있습니다.


 지방 노선이 사라지고, 운임이 늘어난 것은 물론입니다. 특히 인구밀도가 적은 지역에 그 타격은 심각했죠. 철도가 사라지면 인구 유출은 더 가속화되고, 인구가 줄어들면 철도는 또 사라지는 악순환이 이어졌죠.


JR홋카이도의 원맨카. 승무원 한 명만 탑승한다.


 일본 정부가 이 부작용을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닙니다. 1985년 철도 민영화 방안을 연구한 국철재건감리위원회는 전국 철도를 단일한 회사가 운영하는 안을 제시했습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는 감리위원회 총재를 경질하고 분할 민영화를 밀어붙였습니다.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당시 일본을 대표하는 강경파 노동조합이었던 철도노조를 탄압하기 위함이었죠.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도 2005년 NHK 인터뷰에서 이를 인정했습니다. 철도 민영화 이후 1천 명 넘는 노동조합 조합원이 해고됐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일본의 국민에게 교통비의 상승으로 돌아왔습니다. 폐선과 운임 상승은 인구의 감소와 일본 경제의 멈춰버린 성장이 만든 어쩔 수 없는 현상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 따른 이익은 민간 기업에, 손해는 국가에 돌아오는 구조를 정당화하긴 어렵습니다.


에키벤


 일본의 역에는 도시락을 파는 경우가 많습니다. ‘에키벤(駅弁)’이라 부르죠. 철도 이동이 많은 문화가 만들어낸 특색입니다. 큰 역뿐 아니라, 작은 역에서도 역마다 특색 있는 에키벤을 파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에키벤을 찾아 여행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에키벤>이라는 만화도 나와 있고요.


 저도 긴 기차 이동을 할 때면 에키벤을 자주 찾았습니다. 환승을 위해 들린 작은 역에서, 그곳에서만 파는 에키벤을 발견하는 여행의 재미를 즐기기도 했죠.


 하지만 언제까지 이런 재미를 누릴 수 있을까요? 운임은 오르고, 작은 역은 하나둘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 과오를 어디서부터 수정할 수 있을지, 아직 저는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에키벤을 먹으며 열차를 보내면서도, 생각은 깊어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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