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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둘기 Nov 13. 2022

엄마의 립스틱

유통기한 없음


혁이씨에게 오랜만에 립스틱을 선물했다.

제작년 내 생일 즈음에 선물해 주었던 립스틱을 야무지게 거의 다 쓴 혁이씨.


며칠 뒤면 나의 생일이다.

내 생일이라는 것이 있기까지는 많은 사연들이 있었으리라. 한 사람이 한 사람으로 나고, 살아가는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생일’

한 사람이 한 사람으로 살다가 어느 한 사람을 만나, 하나로 살기로 하고 사랑을 나누게 되어서 그 사랑이 또 한 사람으로 만들어져서 그를 몸에 품게 되고, 한 사람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사건. 아우, 사연이 길다.

한 사람의 인생에 고생스럽고도 대견스러운 날, 그 첫눈 오던 91년의 11월 중순 어느 날이 나의 생일이 되었다.


선홍빛을 뗬던 혁이씨의 입술은 66년의 삶 동안 여러 번의 고통의 순간을 깨물어 인내해서인지, 계속된 항암약 복용으로 인해서인지 전보다 그 붉음이 생기를 잃었다.

혁이씨는 집 앞 마트에 가서 대파 한 단을 사더라도 입술에 생기를 주는 사람. 단정하지 않으면 바깥에 나가지 않는 스타일의 사람이었다.


현재 혁이씨가 립스틱을 바르는 날은 병원 외래 진료 날 밖에는 없다. 그것은 혁이씨에게 나름 외출이기에 그녀는 립스틱을 지그시 눌러 바르고 꽃분홍이 된 입술을 감춘 채 그녀만의 외출을 한다.


얼마 전, 혁이씨의 친구 정심씨가 갑작스러운 뇌출혈 전조 증세로 인해 며칠 간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초기에 발견되어 출혈은 진행되지 않았고, 며칠 간 산소치료를 한 뒤 그녀는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내가 ‘이모!’라 부르는 정심씨의 소식은 나에게도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별다른 잔병치레도 없었고, 자그마한 강아지와 매일같이 부지런히 산책을 하며 이렇게 저렇게 70세를 향해 가는 나이에도 여전히 사업을 하던 그녀였다.


사람이 언제 어떻게 아프게 될지, 어떻게 갈지는 정말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픈 친구가 하나 더 늘뻔 한 혁이씨의 오랜 친구들은 마음이 급해졌나 보다.

입술에 생기가 있을 때, 서로 이야기할 수 있을 때, 보다 뚜렷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을 때 만나야겠다고 다짐한 것인지 혁이씨와 정심씨를 만나기 위해 다음주에 우리 집 근처로 오기로 했다.


원래는 이번 주에 만나기로 했었으나 나의 새로운 가족인 시댁에 갑작스러운 초상으로 인해, 그 만남이 연기되었다.

내 입술색도, 가족들의 입술색도 그 며칠 간 빛을 잃었다.


사람일은 정말 모르는 것이다. 며칠 동안 있었던 장례를 되돌아보면서 다시 한번 한 사람이 살아가고 떠나는 것이, 그리고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 새삼스레 느껴진다.


아무튼 나는 혁이씨의 친구들과의 오래간만의 재회 기념, 어쨌든간 내 생일을 만들어준 혁이씨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작은 립스틱을 선물한다.

혁이씨가 좋아하는 꽃분홍색 립스틱. 바르면 유리알처럼 입술에 광택이 돈다.


화장이야 꼭 안 해도 그만이지만 생각해보면 입술에 생기를 줄 수 있는 날들은 그 자체로 참 좋은 날들이다. 이미 생기로 충만한 날들이다.


립스틱이 든 조그마한 케이스에 25년 3월이라는 유통기한 날짜가 눈에 들어온다.

25년 3월이 다가올 때 그 때도 여전히 혁이씨의 생기 담당이고싶다. 새삼스럽지 않은 날들을 기약하고 싶다.

오래오래 함께하자.


혁이씨의 립스틱이 혁이씨의 온기로 무르고 닳기를 간절히 기대하며.


그나저나 나는 내 친구들 언제 만날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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