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모마일 차가 선물해 준 몸과 마음의 따땃함
유난히 몸이 무겁던 날이었다. 어깨에 실린 가방 안에는 어제 마무리 짓지 못한 프로젝트, 기말 페이퍼와 강의 노트 더미, 노트북 그리고 집에서 내려온 커피가 담긴 텀블러가 빼곡히 들어 있었다. 정류장에 내려서 대학원 건물로 가려면 오르막길을 조금 더 걸어야 했다. 빠르게 걷는다고 훨씬 더 빨리 도착하는 것도 아닌데, 조급한 마음에 잰걸음으로 땀을 흘리며 걸었다. 가만있으면 선선한 바람이 불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살짝 땀이 나는 초여름이었다.
약한 몸에 맞는 진로를 결정하지 못해서 어영부영 대학원에 들어간 지 몇 달 되지 않았을 때였다. 친구들은 하나 둘 취업을 했고, 여전히 헷갈리는 마음으로 매일을 살아가던 나는 텀블러에 커피를 담아 다녔다. 교내 카페의 커피는 쓴맛만 나는데도 제법 비쌌다. 약한 몸을 아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연구실 일과 공부를 마냥 놓을 수는 없어서 커피가 늘 필요했다. 차에 기름을 넣듯이, 금세 지치는 몸에 카페인을 넣어 주어야 겨우 하루 일과를 해낼 수 있었다.
그날도 텀블러를 찰랑이며 연구실 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간밤에 춥게 잠든 건지, 아니면 밤 10시에 끝나는 수업의 피로가 가시지 않은 건지 카페인으로도 정신이 차려지지 않았다. 에어컨에서 나오는 찬 바람에 몸을 웅크리고, 책상 칸막이에 슬쩍 머리를 기댄 채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었다. 맑은 정신이 아니라서 이놈의 영어 논문을 이해할 수 없었다. 흰 건 종이요, 검은 건 글자로구나... 생각하며 스크롤을 내리는데, 박사 언니가 내 어깨에 손을 짚었다.
"힘들어 보이는데, 괜찮아요? 휴게실 가서 좀 자고 오지 그래."
선배는 슬며시 에어컨을 꺼주며 휴게실은 신관 건물 2층에 있다고, 따뜻한 이불에 들어가서 좀 쉬다 오라고 했다. 내가 또 아픈 티를 냈구나 싶어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이곤 휴게실로 향했다. 침대 방이 다행히 하나 비어있었다. 오전 시간부터 휴게실에서 잠드는 건 나뿐인 게 어쩌면 당연했다. 전기 매트를 켜고 누워 까만 천장을 마주했다. 이렇게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마다, 그럴 수 있지, 나는 몸이 약하니까, 생각하다가도 울컥 억울해졌다. 나는 왜 그래도 괜찮아야 해? 왜 나만? 하고 따가운 물음을 던지게 됐다. 매트는 몸의 겉면만 데워줄 뿐, 조급해 두근거리는 가슴과 으슬으슬 추운 몸속은 녹여주지 못했다.
30분 정도 후 알람이 울리자,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프로젝트 기한이 다가오고 있어서 언제까지 누워 있을 수만은 없었다. 돌아간 연구실 자리에는 따뜻한 차 한 잔과 쪽지가 놓여 있었다. 박사 선배의 글씨였다.
"점심 먹으러 다녀오는 길에 샀어요. 몸이 따뜻하면 컨디션도 좋아질 거예요."
검은색 뚜껑을 열었더니 투명하게 노란 찻물이 보였다. 티백 속 꽃망울을 보지 않아도, 향긋한 사과 같은 향을 맡는 것만으로 캐모마일 차라는 걸 알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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