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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날 작가 Aug 14. 2023

사춘기 예고편

소녀에서 숙녀가 되는 시기

지금으로부터 1년 전, 4학년 여름방학. 아이는 급격한 감정의 변화를 보였다. 예고도 없이 화를 낸다거나 울었다. 안 그래도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의 감정이 오르락내리락거리기 시작하자 우리 집 분위기도 같이 요동쳤다. 동생들은 그런 언니 옆에서 생각 없이 말하다가 괜히 머쓱해지거나, 씩씩거리는 일이 자주 생겼다.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걸 지켜보는 내 상태도 이미 한계였다. 아이의 예의 없음을 시시때때로 지적했다. 참기 힘들 정도로 비아냥거리는 날은 단전부터 끌어올린 목소리로 아이에게 버럭 하기도 했다. 아이는 납득할 수 없는 일로 혼이 난다는 걸 시위라도 하듯 입을 꾹 다물고 울지 않으려고 눈에 힘을 줬다. 나에겐 그 모습조차 반항처럼 보여 한 소리 더 하고서야 끝이 났다. 매일이 살얼음판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즈음부터 아이에겐 2차 성징이 나타났다. 말랐던 아이가 골반과 허벅지에 제법 살이 올랐다. 얼굴도 아이의 얼굴이 점차 사라지며 좁쌀 여드름이 나기 시작했다. 한동안 나는 주니어 브라와 정수리 냄새를 없애는 샴푸를 검색했다. 주변 엄마들로부터 유니*로 브라가 아이들이 가장 편안해한다는 정보를 듣고 아주 오랜만에 매장을 기웃거리며 사이즈를 가늠해 보고, 지드래곤이 광고했다는 비싼 샴푸를 구입해 아이의 손에 안겨주었다. 다시 아기 시절로 돌아간 듯 아침마다 속옷 불편하다는 아이와 실랑이를 하고, 밤마다 아이의 머리를 말려주었다. 각자의 거리를 지키며 자유를 찾아가던 모녀가 다시 밀착했으니 사달이 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아이는 한동안 학교에서 오면 자기 방으로 들어가 한참 있었다. 무얼 하나 슬쩍 보면 어느 날은 판타지 소설을 여러 권 쌓아놓고 심취해 있었고, 어느 날은 우울하고 비관적인 주인공 소녀의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그러다 잘 시간 즈음이 되면 갑자기 학교에서 일어났던 기분 나빴던 일을 호소하다가 분노했고, 울었다. 한없이 안으로 안으로만 파고드는 아이가 걱정스러워 심리 상담센터를 찾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몸도 마음도 무리를 하듯 자라는 시기. 내 아이는 지금 홀로 외롭게 싸우는 중이 아닐까. 내 품에 있는 시기에 이 아이의 가라앉는 과정을 함께해 줄 수 있으니 오히려 다행 아닌가. 걱정되는 마음이 지나쳐 나도 모르게 아이를 생채기 낸 것이 미안해졌다.


"지금은 그런 시기야. 어른이 되는 일은 쉽지 않거든. 엄마는 아직도 어려운 걸. 다른 친구들도 다 그러니까 너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마. 괜찮아."


이 말이 아이에게 위로가 되었을지 뻔한 말이었을지 모르겠다. 적어도 나에겐 위안이 되었다. '다른 애들도 다 그래. 우리 애가 유난한 게 아니야.' 하루에도 열두 번씩 아이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모른 척하다가 남편을 붙들고 하소연했다. "나 언제까지 이렇게 애 눈치를 보고 살아야 해!!" 속없는 남편은 실실 웃기만 했다. "자아가 자라고 있는 시기야. 잘 크는 중이니까 걱정 마." 당시에는 오히려 내 화를 돋우는 말이었지만, 사실 그 말은 정답이었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계절이 시작되자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을 찾았다. 나도 잔뜩 참은 숨을 후, 하고 뱉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는 대뜸 "엄마, 고마워"라고 말했다. 왜냐고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으니까.  "엄마도 고마워."라고 답했다. 아이는 황당하게 웃으며 뭐가 고마운 지 아냐고 물었다. "몰라. 그런데 알 것 같아." 아이는 나를 꼭 안아줬다. 이제 겨우 한 번의 뜨거운 여름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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