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뚝 스캔해 버리게
"어디 갔지?" 교통카드가 안 보인다. 이러다 늦을 것 같아 현금을 챙겨서 나왔다. 버스를 탔는데 기사님이 카드만 된단다. 현금통이 안 보인다. 내려서 다음 버스 도착 시간을 보니 한참 남았다. 그 버스도 현금통이 없으면 끝이다. 할 수 없이 택시를 탔다. 센스 없는 택시 기사님이 골목길로 안 가시고 도로로 가셔서 엄청 막혔다. 6천 원이면 충분했을 거리를 9천 원이나 냈다. 볼 일을 마치고 집에 가려니 난감하다. '또 택시를 타야 하나? 돈지랄하는 날인가? 걸어가야 하나? 걸어가면 1시간도 넘게 걸리는데.. 우선 버스 정류장에 가보자.' 두근두근.
버스 앞문이 열렸다. 다행히 현금통이 있다. 유레카! 신나서 버스를 타고 집에 무사히 도착했다.
카드가 있을 땐 몰랐는데 카드가 없으니 너무 불편했다. 다음에 도착할 버스가 카드만 되는 버스인지, 현금도 되는 버스인지 네이버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으니 오늘 같은 날은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건가?
아무리 자동화하는 게 편하다지만 오늘의 나처럼 변수라는 게 있기 마련인데 현금통을 아예 없애면 어쩌자는 거지 싶다. 아니면 네이버 지도로 교통편을 조회할 때 카드 전용 버스인지 현금 가능 버스인지도 표시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모든 사람이 당연하게 카드가 있다는 전제로 시스템을 바꿔버리는 건 어찌 보면 너무 배려가 없는 행정이 아닌가 싶었다. 카드 전용 버스가 생기게 된데도 이유가 있겠지만 그런 시스템을 만들 거면 교통편을 조회하는 앱에도 반영이 되게 세심하게 시스템을 바꿔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버스를 좋아하지 않아서 살면서 늘 지하철을 타고 다녔다. 그래서 버스가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최근에 이사를 온 동네는 버스를 타고 나가야 하는 위치라 얼마 전부터 타고 다니기 시작했다. 버스 초보자라 현금통이 없는 버스가 많다는 걸 몰랐던 거겠지만 변수는 고려하지 않은 전제 하의 시스템은 문제가 확실히 있어 보인다.
친정 부모님과 시부모님께 종종 "나이 든 사람들은 인터넷 없던 시절로 돌아가서 살아야 편하다"라는 말을 듣곤 한다. 대부분의 일처리를 인터넷으로 하는 시대다 보니 어르신들이 힘들어하시는 건 다 아는 이야기일 것이다.
인건비가 올라서 주문은 키오스크로 해야 하고 보험 청구를 하는 것도 앱으로 해야 한다. 각 보험사에서 운영하던 지점 사무실이 점점 없어져서 직접 방문해서 보험 청구 업무를 보시던 부모님이 불편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앱으로 청구하는 방법을 수십 번은 가르쳐 드렸지만 앱이 업데이트가 돼서 UI가 바뀌어버리면 또 못하셔서 가르쳐 드린다. 업데이트는 왜 그리 자주 하는지..
젊은 사람이 볼 땐 너무나 쉬운 것이지만 전체 흐름을 이해하는 것이 아닌 순서를 외워서 하시는 부모님은 자신이 외우고 있는 순서에서 못 보던 것이 나타나면 하지를 못하신다.
보험은 젊은 세대만 청구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어르신들이 도와줄 자식이 가까이 사는 것도 아니다. 자식이 없는 분도 계실 것이다. 그러면 동네 동사무소에서 앱으로 보험청구 하는 것을 도와주는 부서가 있나? 그렇지도 않다. 그런데 보험회사에서는 지점들을 없애는 추세다. 앱으로 청구하라고.
자동화하고 신속하게 하는 것도 좋지만 사용자의 다양한 연령층과 상황을 고려해서 여러 선택지를 만들어놔야 하지 않나 싶다. 오늘의 나처럼 카드 없이 현금만 있는 날도 있을 테니 말이다.
세심하게 시스템을 개선해 나갈 것이 아니라면 몸에 칩을 박는 게 어찌 보면 낫지 않을까? 개인정보, 사생활.. 그런 거 괜찮으니까 몸에 칩 박을래. 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을 테니..
20년 전에 봤던 영국 드라마가 있는데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그 사람 맞춤 광고가 길가 옆 벽에 떴었다. 지금 우리가 핸드폰을 할 때 맞춤 광고가 뜨는 것과 비슷하다. 지금이야 핸드폰이지만 20년 후엔 몸에 칩을 박아서 영국드라마에서 봤던 상황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