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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재연 Apr 19. 2021

<장정일의 악서총람>


에세이집을 읽는 것을 좋아해 무작정 골라 읽게 된 책이다. 장정일이라는 작가에 대해서는 자세히 몰랐으나 책을 다 읽은 뒤 호기심이 생겨 검색을 조금 해보니 90년대 문학에서는 중요하게 언급되는 문제적 작가 중 한 명이라고 한다. 검색 과정에서 알게 된 작가의 문제적인 과거 작품들과는 달리 <장정일의 악서총람>은 비교적 최근에 발간되어 음악에 대한 식견을 화려한 필력으로 다루는 문제없는(?) 작품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자신의 음악에 대한 애정을 에세이집으로 내가며 공공연히 드러내듯이, 장정일 역시 자신이 가장 애정 해온 분야 중 하나인 음악에 대해 소상하게 적어보고 싶었던 듯 책의 분량이 꽤 된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히 좋아하는 음악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적는 형식이 아니라 음악을 주제로 하는 책을 읽은 뒤 책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적은 에세이이다. 검색한 내용에 따르면 장정일은 굉장한 독서광이기도 하다고 하는데, 이 책에서 다루는 음악 관력 책만 하더라도 최소 120권이 넘으니 내가 평생 읽은 책보다 많은 양의 음악 관련 책을 읽은셈이다… 저자는 후기에 이 책의 부제로 ‘음악과 사회에 대한 에세이’를 적는 것을 고려했지만 책에 부제의 범주 아래에 묶이기에 적절하지 않은 내용들이 일부 있어 포기했다고 적었다. 작가의 말대로 책의 대부분의 내용은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요소로서 음악을 다루고 있다. 음악과 사회를 연관 지어 다루는 책의 특성이 나에게 맞았는지, 유독 재밌게 읽은 부분이 있어 내 생각을 조금 더해서 적어보려고 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 밀란 쿤데라는 에세이집을 통해 자신의 소설 미학을 음악과 연관 지어 설명한 바 있다. 그는 바로크 시대의 음악이 하모니(화음) 위주였던 데 비해 베토벤을 앞세운 고전주의와 슈베르트, 슈만이 꽃피운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멜로디(선율)가 부상한다고 설명한다. 바흐로 대표되는 바로크 음악의 경우 한 곡의 음악 안에서 다양하고 개별적인 하모니가 다성성을 이루고 있지만, 멜로디가 작곡의 주된 요소로 자리잡은 고전주의 시대 이후로는 다성성이 억압되면서 쉽게 기억되고 즉각적인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멜로디가 독재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소설 역시 음악과 똑같은 퇴보의 과정을 겪고 있다고 설명한다. 소설의 바로크 시대에 해당하는 시기에는 소설에 자유분방한 이야기들과 철학적인 성찰들이 혼거하고 있었으나, 현대 소설에서는 철학적 성찰이라고 해야 할 에세이는 빠져나가고 앙상한 스토리만 남는다고 보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는 하모니와 멜로디에 관한 얘기를 재즈와 록 장르에까지 확장시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데 이 부분이 특히 흥미롭다. 이전에 작가가 언급한 내용을 고려하면 재즈와 록을 각각 하모니와 멜로디에 충실한 음악으로 설명할 것이라고 예상하기 쉽다. 하지만 밀란 쿤데라는 록 장르가 하모니뿐만 아니라 멜로디도 제대로 갖고 있지 못하고 있으며 한순간의 엑스터시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록에 대해서 굉장히 가혹한 평가를 내린 것이다. “소위 이 록 음악은 그 삼상의 원죄로부터 면제되어 있다. 이 음악은 감상적인 게 아니라, 엑스터시이며, 엑스터시의 한순간의 연장이다. 그리고 엑스터시란 시간에서 뽑혀 나온 한순간, 기억 없는 짧은 한순간, 멜로디의 주제는 전개될 공간을 갖지 않으며, 전개도 결론도 없이 그저 되풀이될 뿐이다”라고 쿤데라는 자세히 설명한다. 아쉽게도 장정일은 이러한 밀란 쿤데라의 의견에 대해 이렇다 할 사변을 내지 않고 밀란 쿤데라의 음악적 깊이를 설명하는데 그쳤지만 독자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 것은 확실하다. 



록 음악이 멜로디조차 없는 엑스터시이다? 그렇다면 요새 한창 인기를 얻고 있는 테크노 장르는 어떻게 봐야할까.  예를 들어 유명 록 밴드 오아시스의 대표곡들은 대부분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멜로디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테크노 음악은 아무리 유명한 곡일지라도 반복되는 기계음이 있었다는 사실만 기억될 뿐 정확한 멜로디를 기억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사실상 테크노에는 멜로디가 없고 일정한 리듬과 소리만 있다고 보는 게 맞을 수도 있겠다. 한국 대중음악상 일레트로닉 장르 수상 후보에 오른 프로듀서 넷갈라는 자신의 앨범을 설명하는 인터뷰자리에서 자신의 앨범이 클럽튠이 아닌듯 하다고 설명했다. 인터뷰어 역시 이 의견에 동의했는데, 그 이유는 해당 곡에 프로듀서의 감정이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들은 클럽에서 트는 테크노 음악에 어떤 감정 혹은 메세지의 극적인 전달이 부적절하다는 테크노 씬의 암묵적 룰을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클럽튠의 범주에 들어가는 테크노 음악은 구체적 감상을 느끼기 보다는 심장 박동이 빨라지며 흥분 상태에 들어 저절로 춤을 추게끔 만드는데 우선의 목적이 있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밀란 쿤데라가 설명한 록의 특징과 정확하게 들어맞는 것 같다. 록의 시대가 가고 힙합과 테크노의 시대가 오는 이 시기는 밀란 쿤데라가 칭하는 ‘엑스터시’보다도 더 퇴보하는 음악 장르를 맞이하는 것일까?



시대가 변하며 새롭게 등장하는 음악들을 퇴보하는 것으로 바라보는 이러한 시각에 대해서는 책의 뒷부분에 참고할만한 내용이 나온다. <권력에 맞선 상상력, 문화운동 연대기>라는 책을 통해 장정일은 지배 계급의 권력에 저항한 다양한 문화 운동을 소개했다. ‘상투적인 말하기와 이미지에 도사린 자신들에 대한 편견을 깨기 위해, 더 이상 그 편견 안에 숨어 살기를 거부하고 길거리로 나선 소수자들의 집단적인 문화운동’이라는 표현으로 문화운동을 설명하며 저자가 꺼내드는 것은 음악이다. 펑크록은 1950년대에 런던의 도시 개발로 노동 계급 공동체가 붕괴되면서 생겨났으며, 레게는 카리브 해 연안에 사는 아프리카계 흑인들이 아프리카 귀환을 꾀하는 정치적 노래이다. 미국 흑인들의 힙합 문화 역시 1959년부터 1963년 사이에 뉴욕의 브롱크스 지역을 횡단하는 고속도로가 건설되며 빈민화된 최하층 청년층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테크노 장르 역시 예외는 아니다. 1980년대 중반, 디트로이트는 막대한 경기 하락을 겪으며 ‘미국의 살인수도’로 불릴 정도로 범죄와 가난이 큰 문제를 일으켰으며 무계획적으로 확산된 도시는 무너지고 있었다. 이때의 억압된 사회경제적 환경의 영향을 받아 문화적 절망을 느낀 흑인들이 기존의 흑인 음악을 댄스 뮤직으로 변화시켜 긍정적인 영향을 받고자 한 것이 테크노 문화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90년대에 태어난 나는 락 음악을 듣기는 했지만 힙합 문화가 급속도로 전세계로 확산되는 것을 보고 들으며 자랐다. 락을 들으며 자라왔던 사람들은 분명 힙합을 듣는 사람들에게 음악적 퇴보를 지적하고 싶었던 순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유명 래퍼 칸예 웨스트 역시 이러한 지적을 종종 받았는지 “힙합 래퍼가 이 시대의 새로운 락스타”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한 배경에는 힙합이 락이라는 장르보다 뛰어나서가 아니라 이 시대가 요구하는 문화적 운동으로 힙합이 힘을 얻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돈을 자랑하는 힙합의 문화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을 일삼은 록 뮤지션들이 결과적으로 사회를 바꾸지 못하는 것을 목격하고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회구조를 바꾸는 것보다는 스스로 살아남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고 나타난 대안적 성격이 있는 것일 수 있다. 이렇게 고유의 음악적 성질 이전에 음악이라는 예술매체가 갖는 사회 문화적 운동의 특성을 이해한다면 음악에 차등을 둘 수는 없는 듯하다. 시대를 주름잡는 음악의 장르가 계속해서 변하는 것은 저항하고자 하는 혹은 향유하고자 하는 사회 문화적 특성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음악의 퇴보를 논하기 전에 사회의 진보를 얘기하는 게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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