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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해향취 Mar 23. 2023

아줌마와 민증 검사

평범해서 기적 같은 나날들 Ep.9

낮에는 난생처음 아줌마 소리를 들었고 저녁에는 맥주를 사러 갔다 별안간 민증 검사를 했다.

제법 날이 풀려 산책을 나섰다가 벼락을 맞았다. 동네 복지관을 찾던 어르신이 내게 아줌마라고 부른 것이다. 언제부터 ‘유모차를 끄는 여자 사람’은 아줌마라고 부르기로 했던가. 어르신은 유모차를 끄는 나에게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아줌마라고 했다. 난생처음 듣는 호칭에 놀란 나머지 내 안의 퉁명스러움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몰라요.’ 모릅니다, 모르겠어요. 도 아니고 몰라요. 모른다는 말 중 가장 성의 없고 무책임한 모름이었다. 물론 어르신의 연배를 헤아려 볼 때, 애 엄마라면 으레 아줌마라고 부르던 세대이고 그래서 아줌마라는 말이 젊은 엄마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다는 걸. 오히려 아줌마를 아줌마라고 부른 걸 가지고 기분 상한 나더러 애기 엄마 참 유난스럽다 해도 할 말 없다. 그렇게 어르신의 낡은 세월에 탓을 돌리며 위안 삼았지만, 늦은 저녁이 되도록 화끈거렸다. 결국 맥주의 힘을 빌리러 낮에 걸었던 산책 길을 다시 마주했다. 다음 산책에는 좀 더 어리고 발랄한 행색으로 나서야 하나? 아무래도 얼굴이 많이 상했나? 다른 사람들도 나를 아줌마라고 보면 어떡하지? 왜 하필 ‘줌’이야? 어감도 촌스럽기 짝이 없는데 제대로 열받게 하는 이 말은 대체 누가 만든 거지? 하고 짜증에 가까운 질문에 다다랐을 때,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민증 검사를 요청해 왔다. ‘민증 좀 보여주시겠어요?’라는 말과 함께 얼굴을 몇 번이나 훑어보았기에 분명 형식적인 질문이 아닐 거라 믿는다. 열아홉에서 스무 살로 넘어가는 자정 무렵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말이 오늘의 나를 구원할 줄이야. 하루 종일 끈질기게 달라붙었던 아줌마 주술이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말 한마디에 탁 풀려버린 것이다. 그저 유모차 때문에 그런 소리를 들은 것뿐, 그 누구도 나를 아줌마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남편의 위로도 비로소 소화되었다. 이미 마스크 속 입꼬리와 콧구멍은 씰룩씰룩 대고 입국 심사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괜스레 긴장이 되어 주민등록증을 건네는 손까지 살짝 떨렸다. 설레는 민증 검문을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얼른 남편한테 자랑할 생각에 들떠서 내가 얼마나 동안처럼 보이는지, 스무 살로도 안 보일만큼 앳되 보이는 건지 등 오직 나만이 묻고 답할 수 있는 낯부끄러운 질문을 해댔다.




어릴 적부터 유독 단어 하나, 말 한마디에 집요 하리라만큼 탁탁 꽂히는 탓에 토라지기도 잘 토라지고 풀리기도 잘 풀렸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에 나라는 인간을 다루는 건 손바닥 뒤집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라 여겼지만, 가까운 이들은 나의 그런 점이 종종 어렵게 느껴진다고 토로했다. 특히 남편은 최대 피해자인데, 수년 전 주차 실수를 한 내게 조언을 하다가 ‘주차 뺑소니’라는 단어를 사용해 지금까지도 고통받고 있다. 앞뒤 맥락을 따져보면 그 말은 거듭된 우려에서 튀어나온 수식어일 뿐 결코 나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그럼에도 조언은 온데간데없이 뺑소니라는 단어만 빈 깡통처럼 덩그러니 남아 버린 것이다. 약간(?) 극단적인 면이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만큼 내게 말 한마디가 갖는 힘은 대단하다. 가령 오늘만 해도 복지관을 묻는 어르신이 아줌마가 아닌 새댁이나 애기 엄마라고 불렀으면 나의 하루가 달랐을 테다. (심지어 아줌마는 ‘아주머니’를 낮추어 부르는 말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나는 집요한 구석이 있어서 어김없이 ‘아줌마’라는 호칭에 국한되어 예를 들었는데, 이외에도 똑같은 말도 얼마든지 다정하게 표현할 수 있다. 말 한마디가 천냥 빚을 갚는다고 우리는 좀 더 다정한 언어로 상냥하게 말할 필요가 있다. 당장이 힘들고 대체할만한 말을 떠올리기 귀찮다는 이유로 평생 재산인 말 주머니까지 각박하게 만드는 건 누구보다 자신에게 가장 큰 손해이다. 말이라는 것도 근육과 같아서 자주 쓰는 말만 할 테니. 나 역시 그동안 초등학생을 재미 삼아 ‘잼민이’라고 쉽게 얕잡아 부르고 있던 건 아닌지, 길게 풀어야 고운 말들을 쓸데없이 줄여 말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이어폰을 꽂고 있느라 번번이 감사와 사과의 인사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고단한 하루를 보낸 남편에게 수고했다는 말 대신 잔소리부터 늘어놓진 않았는지. 그리고 당장 오늘 낮부터 되돌아가 말한다. ‘횡단보도 건너서 앞으로 쭉 가시면 복지관이에요. 금방이에요, 어르신.’


2023.03.22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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