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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든어제 Dec 26. 2023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총각김치 담그는 법

그램(g), 밀리(ml) 같은 단위는 사용하지 않는 외할머니 레시피로

아가야, 너는 아직 모르겠지만 할머니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총각김치를 담가

 대전의 작은 할머니는 처음 할머니 총각김치를 먹었을 때의 충격을 아직도 종종 얘기하셔.

 "새신부로 첫인사드리러 찾아갔는데, 총각김치가 너무 맛있는 거야. 내가 총각김치를 좀 더 먹고 싶다는 말을 해야 할지 엄청 고민했잖아!"

 엄마도 대학생 때 혼자 서울에서 자취하면서 할머니 총각김치를 엄청 그리워했어. 무김치 특유의 막을 수 없는 냄새를 겹겹의 비닐에 보자기, 보냉백으로 꽁꽁 감추어 버스를 타고 자취방으로 돌아오면 한 2주는 냉장고를 열 때마다 뿌듯했어. 지금 너의 장난감 박스보다 조금 큰, 밤새도록 요란한 소리를 내던 자취방 냉장고 안에 할머니의 총각김치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엄마는 배도 마음도 든든했거든. 외롭고 허한 마음으로 돌아온 자취방에 혼자 있어도 혼자 있지 않은 느낌이었거든.

 이제 30개월인 너는 고춧가루 하나만 들어가도 '매어, 매어'를 연발하지만, 엄마는 알아. 너는 이 김치를 좋아할 거야. 우리는 대대로 김치를 좋아하는 모녀거든.


무가 맛있는 계절을 알려줄게

 무는 날이 추워져야 맛있어. 할머니 말씀에 옛날부터 어른들은 '겨울무는 먹고 트림만 안 하면 인삼보다 좋다' 하셨대. 겨울무는 단단하고 시원하면서도 씹을수록 달큼해서 생으로 먹어도, 국물을 내 먹어도, 어떻게 먹어도 맛있어. 더운 여름에는 아삭하고 시원한 총각김치를 먹고 싶어도 먹을 수가 없지. 무가 맛있어질 때까지 참고 기다리다가 날이 쌀쌀해질 때쯤이면 총각김치의 계절이 온 거야.

 우리 집은 가을부터 총각김치를 3-4번은 담가. 김치가 익어 무의 맵싸한 맛이 사라질 때쯤이면 햅쌀로 지은 밥에 김치 하나만 얹어도 배부르게 행복할 거야. 할머니표 총각김치 레시피를 알려줄게.


 겉절이가 아닌 이상 김치 담그기는 하루 안에 뚝딱 이루어지지 않아. 한 솥 팔팔 끓인 육수를 식혀야 하거든. 할머니는 김치 담그기 전날에는 항상 큰 솥에 육수를 끓여서 식혀두셔. 큼직한 황태대가리랑 배를 넣고 우린 육수를 넣으면 김치가 엄청 시원해져. '온도'가 아닌 시원함의 '맛'이라니, 아직 30개월 차인 네 반찬들 속에서 알기는 어렵겠지만 머지않아 너도 알게 될 거야.


이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총각김치 레시피야

 총각김치를 담는다 하면 엄마와 할아버지는 할머니 곁에서 함께 알타리 무를 다듬어. 뾰족한 뿌리를 잘라내고, 시든 잎을 잘라내고, 무청과 붙어있는 부분을 깨끗하게 다듬어야 해. 그리고 쪽파는 뿌리를 잘라내고 누렇게 뜬 잎을 떼어내지. 그런 뒤에는 물에 담가두었다가 무와 무청에 붙어있는 흙을 떼어내고 깨끗이 씻는 거야. 그리고 굵은소금에 총각무를 절여야 해. 근데 이게 참 까다로워. 무와 잎이 소금에 절여지는 시간이 다르니까. 어느 날 궁금해서 할머니께 비결을 여쭤봤더니 이렇게 무는 무대로, 잎은 잎대로 모아주고, 무가 겹쳐지는 곳에는 잎보다 더 많은 소금을 뿌려주는 거래. 

 할머니는 종종 '이럴 땐 대체 어떻게 해야 해?'라는 엄마의 물음에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쉬운 해결책을 알려주시곤 해. 이 두께도 성질도 다른 알타리의 무와 잎을 한 대야 안에서 절이는 단순하고도 과학적인 방법처럼. 나중에 엄마한테 말 못 할 고민이 생긴다면 비밀리에 할머니께 여쭤봐. 할머니는 엄마가 아는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니까.


할머니 레시피엔 g(그램)도, ml(밀리리터)도 없어

 하지만 걱정 마. 음식을 많이 먹어보고 해 볼수록 '적당히', '조금만'이라는 신비한 표현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니까. 엄마도 할머니께 음식을 배울 때 '얼마큼' 넣어야 하는지, '얼마나' 끓여야 하는지에 대해 단 한 번도 확실한 답변을 들은 적이 없지만 미역국, 된장찌개만큼은 할머니 맛 비스무리하게는 쫓아갈 수 있게 되었어. '아, 이렇게 하면 엄마 맛이 나는구나.', '엄마가 말한 적당히가 이거구나!' 하는 순간이 너에게도 찾아올 거야.


 하루 전날 쑤어둔 육수에 식은 밥을 한 덩이 넣고 믹서기에 갈아주면 아주 쉽게 풀을 만들 수 있어. 믿을 수 없겠지만 여기에 고춧가루, 다진 마늘, 액젓과 소금 그리고 설탕을 조금 넣으면 양념 준비는 끝이야.

 모든 음식의 간은 처음부터 세게 잡지 않는 게 좋아. 간이 약한 건 조금씩 추가하면 되지만 첫 간이 너무 세면 되돌리기 어렵거든. 총각김치는 이미 소금에 절여놓았기 때문에 더더욱 처음부터 많은 액젓을 넣지 않아. 중간중간 간을 보면서 반컵씩 추가하지. 할머니는 액젓은 멸치액젓이나 까나리액젓 아무거나 써도 상관없다 하셔. 다만 간이 맞을 때까지 액젓만 다 넣기보다는 액젓 냄새가 짙어졌다 싶을 때부터는 소금으로 간을 추가하지. 액젓이나 젓갈이 너무 많이 들어가면 나중에 김치에서 콤콤한 냄새가 나기도 하거든.


아참, 엄마가 꼭 미리 말해줘야 하는 게 있었네. 마늘은 정말 '많이' 들어가. 할머니가 김치를 담그실 때마다 엄마는 옆에서 다진 마늘통을 들고 대기하는데, '엄마, 이만큼?' '아니, 더 많이' '그럼 이만큼?' '아니, 더 많이' 항상 다진 마늘을 넣을 때마다 반복하지만 그때마다 놀랄만한 양의 마늘이 들어가거든. 우리 아가도 좀 더 크면 햇마늘이 나는 때에는 온 가족이 모여서 마늘을 까야한다는 걸 알게 될 거야. 다들 장갑 낀 손에 작은 과도를 들고 까고 까고, 또 까도 줄어들지 않는 마늘 더미와 마늘 냄새에서부터 그 해의 김장이 시작되는 거야. 

 그런데 엄마는 그 시간이 좋아. 뒤로 들리는 TV소리, 대부분은 야구 중계일 그 소리를 배경으로 도란도란 별 거 아닌 이야기 나누며 둘러앉아서 손으로는 마늘을 까는 시간. 그해 가을, 겨울의 마늘창고를 꽉꽉 채우고 김장도 준비하는 시간. 우리 가족 배를 불릴 재료를 미리미리 채워 넣는 시간. 몸에도 좋은 알싸한 햇마늘을 직접 까고 닦아 다져서 냉장실과 냉동실에 차곡차곡 넣어두는 시간. 

 너에게 이 글을 쓰는 시간도 그래. 엄마에겐 지금 이 시간이 나중에 네게 먹일 음식들을 미리미리 채워 넣는 시간이야. 나는 이 시간이 좋아. 주말이 지나 내일이면 엄마, 아빠가 출근해야 한다는 걸 알기에 더 놀고 싶다며 유난히 길게 칭얼거리는 너를 겨우 달래 재우고선 그 옆에서 네게 남기는 할머니의 김치 레시피. 언젠가 배고픈 날에 이 김치가 너에게 시원하고 개운한 하루의 마무리가 되어주길.


 사랑하는 나의 아이야, 종알종알 하루종일 수다스러운 30개월의 너는 종종 엄마에게 '하늘만큼 땅만큼 바다만큼 우주만큼 많이 많이 사랑해'라고 말해준단다.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 땅이 얼마나 넓은지, 바다가 얼마나 큰지, 우주는 어디인지도 모른 채 엄마가 네게 하는 말을 따라 하는 것이겠지만 엄마는 그 말에 항상 다시 한번 다짐해. 너를 위해 좋은 사람이 될게. 네가 사랑하는 엄마로 네 앞에 부끄럽지 않게 너를 위해 멋진 사람이 될게. 내일은 아침 일찍 일어나 뜨끈한 밥에 김치 올려 든든히 먹고 출근할 거야. 오늘도 네가 나한테 사랑한다 말했거든. 힘내서 씩씩하게 또 다녀올게.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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