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크림브륄레 Nov 30. 2022

좋은 날도 있고 나쁜 날도 있는 거지

그런 날도 있는 거야

시계 분침이 4를 가리키면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간다.

여기 어린이집은 특이하게도 오전 간식을 선생님들이 준비한다.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 오전에 간식까지 준비하랴 선생님들은 힘들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일손을 늘리려고 나 같은 보조교사를 뽑은 것 같다.


이 시간이 제일 싫다. 이 시간이 다가오면 긴장해서 몸이 빳빳하게 굳는다.

오전 간식은 주로 과일, 채소가 나오는데 손이 좀 간다.

과일은 기본적으로 껍질을 전부 깎는다. 씨도 빼야 하고, 아이들 입 크기에 맞게 잘게 썰어야 한다.

아이들 수에 맞게 그릇과 포크도 준비한다. 애들 수가 대략 30명이니까, 과일도 꽤 많이 깎아야 한다.

간식 준비는 선생님 둘이서 한다. 내가 온 뒤로 간식 준비는 나의 업무가 되었다. 그래서 기존에 하던 선생님 중 한 분이 나를 도와 손질하고 나머지 한 분은 그릇과 포크를 세팅하기도 한다.


오늘은 키위를 준비하는 날이다. 냉장고에서 한 통을 꺼내 전부 씻었다. 키위는 처음인지라, 어떻게 잘라야 하나 난감했다. 당근은 동그랗게 썰고 사과는 네모나게 썰었는데, 키위는 대체 어떻게 썰어야 하지?


"그냥 다 물어보세요. 귀찮을 정도로 물어봐도 되니까 조금이라도 모르면 물어보세요."

약 한 달 전, 회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이들 등원 시간. 선생님들이 하나둘씩 오는 아이들을 맞이하며 분주하게 뛰어다닌다. 다들 이렇게나 바쁜데 물어봐도 되나. 주방과 반 사이를 서성이길 여러 번 반복했다.

'그래. 안 물어보는 것보단 물어보는 게 낫지.'


"껍질 깎고 사등분? 사등분하면 될 것 같아요~"

정확히 이해는 못 했지만 대충 알은체하고 다시 주방으로 돌아갔다. 키위를 든 순간 다시 K 선생님이 나타나 키위 하나를 눈앞에서 깎아주셨다.

껍질을 세로로 벗기고, 당근 간식 썰듯이 동그랗게 썰으셨다. 그리고 키위 한 조각을 사등분하셨다. 거기서 눈치챘어야 했는데, 나는 왜 이리 일 센스가 없는지 모르겠다.

선생님이 써는 걸 보고 '아~당근처럼 둥글게 써는 거구나. 근데 왜 저 마지막 거는 사등분하셨지?'라고 생각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더 이상 선생님을 귀찮게 할 수 없어 알겠다며 일을 시작했다.


껍질이 단단해서 잘 깎이지 않았다. 껍질을 얇게 깎으니 짙은 초록색이 모습을 드러냈다.

'좀 딱딱하네. 애들 먹기 안 좋겠다.'

그 후로는 껍질을 조금 두껍게 깎았다. 껍질과 함께 키위가 떨어져 나갔고 키위는 점점 더 작아졌다.

아까움에 키위를 숟가락으로 파먹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건 내 키위가 아니니까. 애들 편하게 잘라줘야지.'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칼질을 했다.


속도가 나질 않았다. 가뜩이나 손도 느린데 키위는 산더미라 깎아도 깎아도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쯤 되면 선생님 한 분이 오셔서 도와주는데.. 아무도 오질 않았다. 조금 여유가 생긴 선생님들께 도와달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지나가다 과일 깎는 날 보고 힐긋 보며 지나가시곤 했다. 아무도 도와주시지 않았다. 이제 두 달 차고, 나 혼자 할 수 있겠다 생각하신 걸까. 막내이자 보조교사인 내가 선생님들께 도와달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도움을 청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어쩐지 막내인 내가 그러면 안 될 것만 같았다. 표면적으로는 도와달라고 하는 것이지만, 어떻게 보면 윗사람에게 일을 시키는 것만 같아서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결국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외로이 키위를 깎았고, 거의 다 깎고 나니 조리사님이 오셔서 주방에서 나가야 했다. 평소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된 것 같았다.

키위가 5개 정도 남았지만, 자리를 비켜줘야 하니 일단 깎은 것만 들고 나왔다.


아이들 그릇 하나하나에 키위를 담으려던 그 순간,

"어, 이거 이렇게 자르면 안 되는데."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고 속으로 '헉!' 소리를 질렀다.

"이거 더 잘게 잘라야 해요."

아찔했다. 겨우 다 잘랐다고 생각했고 혼자서 잘 끝마쳤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무슨 일이지.

또 실수했다는 생각에 민망했지만, 민망할 새도 없이 눈앞 장면이 휙휙 바뀌었다.

G선생님께서 빠르게 도마랑 칼을 가지고 오셔서 쭈그려 앉아 키위를 잘게 썰기 시작했다.

J선생님도 옆에서 같이 도와주셨고, 나는 어색해하며 잘린 키위를 그릇에 담았다.


선생님들이 도와주셔서 잘 끝냈지만, 나는 하루 종일 어깨를 피지 못했다.

또 실수했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어딘가 위축되어 잘 웃지도 못하였다.

아무도 모르지만 실수를 조금이라도 만회하기 위해 뒤에서 더 열심히 일 했다. 아이들과 더 열심히 상호작용하고 더 열심히 할 일을 했다. 집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대체 언제쯤 실수를 안 할까. 실수하는 나 자신이 싫었고 자신감은 갈수록 떨어져만 갔다.


분명 그랬는데.........

다음날엔 웃으면서 집에 갔다.

그날은 실수를 딱히 하지도 않았고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아, 물론 아이들은 말을 듣지 않아 조금 힘들었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언제나 내 마음대로 행동하지 않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다. 말은 듣지 않았지만 좋아질 거라는 믿음이 있었고, 나와 선생님들 간의 사이도 좋았다. 시시콜콜한 얘기도 가끔 주고받으며 웃기도 했다. 별 탈 없었기에 퇴근시간에 싱글벙글 '퇴근이다!'를 외치며 퇴근했다. 집 가는 길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는데, 문득 어제 생각이 났다.


'어? 이래도 되는 건가..?'


어제는 실수 하나 했다고 하루 종일 침울하고 위축됐었는데. 오늘은 이렇게 신나도 되는 건가. 어제는 때려치우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이대로 어린이집에서 쭉 일해도 괜찮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어제오늘이 달라도 되는 건가. 작은 일에 내가 비일비재하는 걸까. 내 멘탈은 정말 유리멘탈인 건가.

감정이 이렇게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었는데 이제야 알다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앞으로도 하루 걸러 하루씩 좋고 나쁘고를 반복하면 어쩌나 골치가 아팠다. 

언제쯤 능청스럽게 일을 해내는 프로 직장인이 될 수 있을까?


어제는 세상 우울하더니 오늘은 세상 행복한 내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오늘 기분이 좋기 때문일까? 그다지 큰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머릿속이 심플해졌다.


매일이 좋을 순 없지만 그렇다고 매일이 나쁘지도 않았다. 나쁜 날도 있었지만 분명 오늘처럼 좋은 날도 있었을 것이다. 있었던 것 같다 분명히.

'그래 좋은 날도 있고, 나쁜 날도 있는 거지.'

계속 내려가기만 하는 롤러코스터도, 계속 올라가기만 하는 롤러코스터도 없으니까.

내려갈 때가 있으면 올라갈 때도 있는 거지. 그런 거지 뭐. 어떻게 항상 좋기만 하겠어. 또 어떻게 항상 나쁘기만 하겠어.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는 거지.


내일 또다시 안 좋아진데도 우울해진데도 괜찮다. 지내다 보면 다시 좋아질 거니까. 좋은 날도 분명 찾아올 거니까. 그 믿음이 나를 버티게 해 준다. 내일 출근이 두렵지 않게 만들어준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향형 인간이 일터에서 살아남는 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