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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진 Dec 17. 2019

마음 작명소 : 설렘

사랑에 막 빠진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할까



초등학교 5학년 반장선거. 나는 1표 차이로 부반장이 됐다. 반장인 남자애는 그 해 전학온 우리동네 교회 목사님 아들래미였다. 조금 우스웠던 건 나 역시 그 아이를 반장으로 뽑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땐 권력욕이 있었던 것 같은)나는 내 이름을 쓰긴 민망해서 당선하지 못할 것 같은 그 아이의 이름을 써내는 전략을 펼쳤으나 많은 선거가 그랬듯 내 예상은 빗나갔다.


뭐 어쨌든 그 아이는 반장이자 내 짝지가 됐다. 그는 속없이 무던한 착한 아이였지만, 나는 원래 내 자리(라고 생각했던)였던 반장자리를 앗아간 그 아이에게 묘한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해서, 우리 사이는 조금 서먹하고 어색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체육을 마치고 4교시 학급회의를 준비하던 3교시 쉬는 시간. 나는 오르간 의자 위에 올라서서 그날 학급회의안을 칠판에 적고 그 아인 오르간에 걸터앉아 이런저런 이야길 나누던 그 때. 판서를 하던 내가 문득 ‘아까 내가 못해서 우리 편이 진 거 같다’고 말하자 그 아인 ‘아니다, 니 잘했다. 그리고 연습하면 더 잘할거야’라고 말해주었다. 그 말이 너무 놀랍고 다정스러워 나도 모르게 뒤돌아봤다. 오르간에 걸터앉은 그 아이가 웃는 모습이 해사해서, 나는 ‘이렇게 햇살이 좋았나’ 했다.


아무 말 않고 다시 판서하는 내내 나는 조그맣게 변한 그 아이가 내 가슴팍을 쿵쿵하고 두드리는 소릴 들었다. 열어줘 열어줘 쿵쿵 두드리는 미니미의 목덜미를 잡아 휙하니 던져버렸지만 그날 이후로 눈만 감으면 오르간에 앉은 채 웃던 그 모습이 생각나


나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앗, 젠장’을 느꼈다.



안보면 상관없는데 짝지니까 피할 길이 없었다. 반장 부반장 엮어서 심부름도 많이 하고, 남아서 일도 많이 하고, 같이 전교어린이회의도 가고, 시험지 채점도 하고, 청소도 하고, 또 그 아이가 오르간을 치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햇살같던 나날.


타고난 성품이 다정다감했던 그 아이가 ‘이 책 재밌는데 한번 읽어봐’라고 무심히 빌려주던 그 순간 나는 내 가슴팍을 쾅쾅 두드리던 그 미니미가 드디어 칼을 들고 와 가슴 한복판을 쿡! 찌르곤 마침내 그 틈을 헤집고 들어왔음을 알았다.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픈가 했더니 자꾸 내 마음에 들어오려고 해서 아픈거였구나’라는 생애 첫 깨달음. 이제는 낯간지러운 그날의 일기에는 달콤하기 그지없는 절망의 언어가 가득하다. 그 일기를 3글자로 줄인 게 이거다. ‘앗, 젠장.’



12살의 그 깨달음이 너무 강렬해서였을까.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 대학생이 되어서도, 졸업을 하고 일을 하면서도 이 사람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마다 나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앗, 젠장. 또 당했어’를 외치는 것이다.


아름다운 것의 시작이자 나의 온 에너지를 다른 존재에게 쏟게 될 행위의 시작이 후회와 아픔이라는 건 어쩌면 사랑의 예비로서 당연할 지도 모르겠다. 일찍이 사랑의 신 큐피트는 금촉 화살과 납촉 화살을 들고 다니며 사람들의 가슴팍을 겨누지 않았던가. 화살에 맞은 느낌과 사랑이 오는 느낌은 얼마나 닮았을까. 금촉 화살에 찔린 그 순간 사랑 앞에 무릎 꿇고 포로가 되길 주저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도 나처럼 외칠까. 앗,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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