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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호 Dec 19. 2020

선행학습은 학원가의 돈벌이에 불과하다.

12살이 될 때까지 나는 사교육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어머니가 일을 했기 때문에 교육에 특별히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5학년이 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처음으로 수학 학원에 등록하기 위한 시험을 쳤는데, 수준 미달이었던 것이다. 나는 수학을 제일 못하는 반에서도 거의 꼴찌를 했다.


당연히 우수반에 들어갈 줄로 알았던 어머니는 충격을 받았다. 우수까진 아니더라도 그래도 '평균'은 할 거라 어렴풋이 생각했을 것 같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사교육과 함께 주입식 교육이 시작되었다. 수학에 이어 영어, 과학, 국어, 한문, 미술, 그리고 주말에는 농구까지 학원을 끊었다. 수학의 경우에는 성적이 너무 안 좋아서 과외까지 추가로 했다.


13살이었던 나의 일주일은 학원 스케줄로 꽉 차 있었다. 동시에 8개 이상의 학원을 다닌 적도 있다. 학교가 끝나면 학원에서 학원으로 옮겨 다녔다. 주말에는 미술, 음악, 체육 등을 해야 했다. 


당시에는 일반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선행학습이 필수였다. 5학년 때 처음 수학을 시작해서 중학교 1학년 때까지 고등학교 1학년 수학까지 모두 마쳤다. 3년 동안 6년치 과정을 끝낸 것이다. 중학교 2~3학년 동안 해외 유학을 갔다 오고 나서도 수학 진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분량이었다.


선행학습은 나쁜 것일까? 그렇지만은 않다. 학년은 인위적인 구분일 뿐이다. 이해가 빠르면 초등학생이 대학교 과정을 공부한다 해도 전혀 문제가 없다. 오히려 잘한다고 격려해줄 일이다.


하지만 선행학습이 나쁜 진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대부분의 경우에 아이들의 호기심을 죽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선행학습을 하게 되는 이유가 오늘 학습한 내용이 너무 재미있고 다음 내용이 기다려져서 자연스럽게 진도를 나가게 된 것이 아니다. 90%가 넘는 학생은 원하지 않아도 선생님이나 부모님의 강압에 의해 진도를 빨리 나가게 된다.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무언의 압박이 있다.


'네 친구들은 벌써 진도를 저만큼이나 나갔다는데, 너는 왜 아직도 그것밖에 안 되니?'


이처럼 남들한테 질 수 없다는 경쟁 심리가 작용한다. 아이들은 아직 수업 내용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호기심을 갖게 될 계기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진도는 나가기 시작하고 공부하는 것이 강제가 되어 재미가 없어진다. 이때쯤 '공부를 왜 해야할까?'라는 고민을 하게 되고 때로는 억지로 그 이유를 찾아내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결과적으로 아이들은 공부에 호기심을 잃게 된다. 어려서부터 친구들과 비교당하는 것에 주눅이 든 학생들이 공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 당연히 '원래 공부는 억지로 시켜서 하는 지루한 것'이라는 인식이 생기게 된다. 심한 경우에는 어릴 적 경험이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기도 한다.






학원에서는 학생들과 부모님들의 경쟁심을 교묘하게 자극한다. 만약 성적이 잘 나오면 안심할 수 있다. 학생과 부모님은 스스로 '앞서 나가고 있다'는 만족감을 받는다. 그래서 계속해서 더 선행학습에 열을 올린다. 하지만 만약 성적이 잘 나오지 않으면 남들보다 뒤처지고 있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든다. 빨리 부족한 부분을 채워서 최소한 남들 만큼, 혹은 남들보다 더 잘하게 해야만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 학원에서는 이 두 가지 감정, '만족감'과 '조바심'을 부추겨서 꼭 필요하지도 않은 진도를 계속해서 더 나가게 만드는 것이다.


어른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이게 다 네가 잘되라고 한 일이다!' 지금 조금 힘들더라도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니 시키는대로 하라는 뜻이다. 하지만 어른들이 나를 위해서 해준 일이 반드시 나에게 좋은 일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여기에 딱 맞는 표현으로 <조장>이라는 단어가 있다. 한자로는 '도울 조' + '자랄 장'으로, 자라는 것을 돕는다는 뜻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좋은 말이다. 하지만 조장은 항상 부정적인 일에 쓰인다. 예를 들면 '복권은 사행심을 조장한다'처럼 쓰인다. 복권은 복을 부르는 종이지만 오히려 사람들이 요행을 바라게 부추기는 효과가 더 크다.


<조장>은 자라는 것을 돕는다는 의미인데 왜 나쁘게 쓰일까?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한 농부가 자신의 논에 벼를 심고 매일 정성들여 농사를 짓고 있었다. 농부는 벼가 잘 자라기만을 바랐다. 그러던 어느 날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농부는 자신의 벼를 조금씩 손으로 뽑아 키를 높여주었다. 그러고는 아내에게 '내가 오늘 벼를 위해 정말 좋은 일을 했다오!'라고 자랑했다.


벼는 과연 잘 자랐을까? 잠깐 키가 자란 듯했지만, 싹이 뽑혀 다 죽어버렸다. 농부는 벼를 너무나 위하는 마음으로 도와주려 했지만, 그것은 결국 벼를 죽이는 일이었다.


어른들의 '이게 다 네가 잘되라고 한 일이다!'는 말이 이와 같다. 아이들은 벼이삭과 같이 환경만 잘 조성해주면 저마다 때가 되어 다 자라난다. 하지만 옆에 조금 더 앞서나가는 친구를 따라잡겠다는 과도한 경쟁심은 결국 싹을 뽑아버려서 죽게 만든다. 아이들에게서 죽은 것은 무엇일까? 바로 호기심이다.






한국 학생들의 수학 성적이 중고등학생 때는 세계 최고라고 한다. 한국의 교육열은 세계에서 손꼽을 정도이다. 이 사실에 자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 한국에서 중간도 못하는 학생이 외국에 나가면 갑자기 수학 전교 1등을 하기도 한다.


좋은 일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한국 학생들이 과도한 선행학습에 매달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그 증거는 한국 학생들이 대학생이 되면 수학 수준이 갑자기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 똑똑하던 학생들은 다 어떻게 된 걸까? 이런 일이 생기는 이유는 어린 학생들이 스스로 '성장'하지 못하고, 인위적으로 '조장'당했기 때문이다.



선행학습은 본래 나쁜 것이 아니었지만, 부모들의 경쟁심을 교묘하게 자극하는 돈벌이로 전락해 버렸다. 어른들의 '다 너를 위한 거다!'라는 헛된 욕심이 아이들의 호기심을 죽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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