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둥과 번개를 뚫고 수확한 농작물
무슨 일을 할 때 가장 시간이 잘 가느냐 이런 질문을 브런치글을 통해 받은 적이 있는데, 주저 없이 떠오른 답은 텃밭농사일이었다. 올여름과 같은 날씨에도 주 2회씩은 꼭 밭에 다녔다. 오늘도 이른 아침에 비가 온다는 예보를 확인했지만, 비 조금 맞는 편이 다른 일정 조정하는 것보다 낫다는 판단으로 새벽 일찍 집을 나섰다. 출발할 때는 비가 오지 않았다. 굿!
도착지 전철역에서 밖으로 나오니 비가 조금씩 내렸다. 그런데 10 분 가량 걸어 올라가 거의 밭 언저리에 도착하자 이번엔 천둥과 번개까지 동반한 악천후다. 버스, 전철 환승하면서 한 시간 가량 걸려서 왔기 때문에 이대로 돌아가는 것은 너무 억울했다. 그냥 고우!
우산, 우비는 무용지물. 밭에 발을 들이는 순간 온몸은 곧 비와 한 몸이 되었고, 내 사랑하는 농작물은 울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네. 알았어, 알았어!
급한 순서대로 손길을 주고 있는데, 또 천둥과 번개다. 지인들과 웃으며 ‘나는 90세 넘도록 밭에서 일하다가 밭고랑에서 죽고 싶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정말 말이 씨가 되면 어떡하지? 엄마가 벼락 맞아 죽는다면 내 아이들이 얼마나 참담하겠나 이런 생각들이 스치면서 무서워졌다. 잠시 주변의 원두막으로 피신한 후 그래도 살겠다고 챙겨 온 간식을 먹으면서 천둥과 번개가 멈추는 시간을 체크했다. 20분 이상 천둥과 번개가 멈춘 것을 확인하고 다시 내 밭으로 들어가 수확을 기다리는 것들만 수확한 후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전철에서 내려 환승 버스를 기다리는데 이 무슨 시추에이션? 비가 그쳤다. 너무 억울했다. 내 손길을 기다리는 작물들을 그냥 두고 왔는데, 이대로 다시 거꾸로 타고 돌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시점에서 줄줄이 딸만 낳으신 엄마 말씀이 생각났다. 출산 후 또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바로 당장 아들을 다시 낳고 싶었다’고 하신 말씀. 출산의 고통, 산후조리, 이런 것은 남의 나라 이야기였던 우리 엄마 생각이 왜 났을까?
목숨 걸고 수확해 온 작물들이 적지 않아 많이 위로가 된다.
2025. 08.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