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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주키 Mar 27. 2021

갑작스레 히어로가 되었다

2014 Kromeriz, Czech

 눈동자에 주황색 빛깔이 다 없어지고 나서야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혀끝에 먼지 맛이 느껴지는 터널을 지나 산뜻한 공기를 마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터널과 한강대교, 좀처럼 잘 가지 않던 이촌동까지. 오늘은 유독 많이 달렸다. 요 며칠간 추석 음식으로 복부를 혹하게 단련시킨 탓이었다.

 그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들과 한잔하고, 노오란 튀김옷을 입은 갓 튀긴 동태전에 맥주 한 잔. 심지어 새벽 영화를 보다가 출출해서 컵라면까지 먹었다. 

 어쩌면 명절이 지방덩어리들의 혹한기 훈련 시즌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 덕에 가만히 있던 두 다리도 어쩔 수 없이 훈련에 돌입해야 했는데, 복부가 무거워진 만큼 더 멀리까지 뛰어가야만 했다. 평소보다 무거운 몸때문인지 두 다리는 금세 후들거렸다. 터널을 지날 때는 마스크를 착용했지만, KF라는 글씨가 없는 마스크여서 혀를 통해 먼지 맛이 고스란히 느껴졌고, 터널을 지나는 내내 숨을 참고 달려야만 했다. 터널을 빠져나와 산소가 여전히 부족한 상태로 작열하는 정오의 태양을 보니, 머리가 핑하고 돌았다.

 피로감이 몰려왔다.


 터널 바로 앞에는 집까지 운행하는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고작 한 정거장이지만, 버스를 탈까 말까 잠시 동안 고민했다. 하지만 승객을 위해서도(내 몸의 땀때문이다.), 운동을 끝까지 해냈다는 내 성취감을 위해서도 버스를 타지 않는 게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콧구멍 한쪽에 남아있던 먼지 향과 공기를 50:50 정도로 섞어 들이마시며, 후드 집업의 모자 줄을 쭉-하고 잡아당겼다. 얼굴과 밀착된 면소재의 모자가 심장처럼 응축했다가 다시 천천히 펴졌다.

 모자가 어느 정도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을 때쯤, 다시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마치 줄을 당기면 움직이는 인형과도 같았다.


 하지만 인형처럼 줄을 당긴다고 해서 계속해서 움직일 수 있는 체력은 없었다. 조금밖에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힘들었다. '잠시 쉴까?' 생각이 들었는데, 마침 눈앞에 횡단보도 가까워지는 게 보여서 속도를 슬그머니 늦췄다.

 내 의지에 의해 속도를 늦추는 건 꽤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겠지만, 지금 이렇게 멈추는 건 다 횡단보도와 빨간 불이 켜진 신호등 때문이었으므로 괜찮았다.


 횡단보도 앞에서 고생한 무릎에게 위로라도 건네듯, 자세를 낮춰 양 손바닥을 무릎에 대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척추뼈가 빠져나와 용처럼 하늘로 솟구칠 듯이 몸이 크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 움직임에 맞춰 내 시선도 위아래로 흔들렸는데, 그때 작고 귀여운 생명체가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한 손에는 주먹만 한 자동차 장난감을 든 꼬마 아이가 다른 한 손으로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젤리처럼 탄력이 느껴지는 발그레한 볼에 귀여운 원색 옷을 입은 아이가 동그랗고 큰 눈으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귀에 꽉 끼어 놓은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으로 낮고 강렬한 베이스음이 자주 등장하는 러닝용 음악을 듣고 있어서 아이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소리보다는 아이의 입모양에 의지할 필요가 있는 듯했다. 어쩔 수 없이 아이의 빛나는 눈에서 오동통한 입술로 미세하게 시선을 옮겼다.

 그 작은 입술에서 이응과 리을이 느껴졌다. 

‘뭐라는 거지? 이리? 이로? 이리로 오라고?’

결국 음악을 포기하고 손을 올려 한쪽 이어폰을 뺀 채로, 아이의 목소리를 들어보니 나한테 히어로란다.

“아, 히어로?”


 위아래가 딱 달라붙는 검은색 운동복을 입고 있었는데, 후드를 뒤집어쓰고 코로나 때문에 마스크까지 끼고 있으니 수상해 보이기는 했을 것이다.

‘형아... 아니 삼촌은 히어로가 아니야. 히어로는 고작 이 정도로 지치지 않는단다.’

 속으로만 말했다.


 속마음과는 다르게, 나를 히어로라고 생각하는 그 어린아이의 기대를 저버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신호등의 색이 녹색으로 바뀌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유로운 척 아이에게 눈인사를 하고는, 신발에 로켓이라도 달려있는 것처럼 빠르게 반대편을 향해 뛰쳐나갔다.

 거기다가 나도 모르게 횡단보도의 흰색 부분만 밟으며 달렸는데, 아마도 내가 악당이 아니라 착한 영웅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 모습을 꼬마 녀석이 보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아이의 부모님이 이상한 사람이라며, 아이의 눈을 가리고 혀를 끌끌 찼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히어로로서의 첫 임무를 완수하곤, 기분 좋게 모퉁이를 돌아 골목으로 들어갔다.


 아이의 시선이 다가올 수 없는 곳에 들어가자마자, 다시 자리에 멈춰 섰다. 이번에 멈춘 것은 호흡이 딸려서는 아니었다. 어느 주택에 매달린 큰 창문을 통해 내 몰골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창문 안쪽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도록, 선팅이 되어있는 창문이어서 땀에 절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어 있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니, 이거 영웅이 아니라 미역 한줄기 머리에 얹은 해녀인데...?”

 후드티 끈을 졸라맨 덕에 마치 해녀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마도 그 꼬마 녀석이 어느 어촌마을만 가도 눈이 휘둥그레질 것 같다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환상과는 다른 현실 속 내 모습을 확인하곤,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꾸 오동통한 입모양이 아른거렸다. 아이의 귀여운 모습에 어느덧 피로는 잊은 것 같았다.


 어린 시절의 나도 히어로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덧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 철없는 어른이가 되어버렸다. 그런 나에게 히어로라고 말해준 그 꼬마 녀석이 마냥 귀엽고 고마웠다.

 중고등학교 때는 히어로라고 불리는 사람보다는 많은 것을 잘하는 사람, 다재다능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히어로로 따지면, 변신의 귀재 카멜레온맨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음...카멜레온맨. 이름은 드럽게 멋이 없다.)

 욕심이 많아서 그런지, 아니면 관심받는 걸 좋아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한 가지만 진득하니 잘하는 걸로는 만족이 안됐다.

 그래서 피아노, 사진, 공예, 춤, 영어와 같이 학원이 있는 곳이라면 웬만한 곳은 다 가봤던 것 같다. 그렇게 이것저것 해보다 보니, 계속하게 되는 것도 있고 금방 애정이 식어버린 것도 있었다.

 그런 나를 보고 누군가는 "너 금사빠야?"라며 한 가지만 집중해보라고 말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금방 사랑에 빠지는 게 뭐 잘못된 것인가. 금방 식지만 않으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하나만 택하기엔 세상에는 재미있는 것들 투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친구의 충고는 가볍게 무시한 채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갖다 보니, 딱히 대회에 나갈 만큼 전문성을 갖기는 어려웠다. 다재다능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내게 중요한 것은 전문적으로 잘하는 것보다는 즐기는 것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여러 가지 분야를 즐기다 보니, 정말 나는 카멜레온맨처럼 그 누구라도 될 수 있었다. 실력은 중요치 않았다.

 여행을 떠나서 사진작가가 되어보기도 하고, 혼자 방 안에서 피아니스트가 되기도 한다던가. 어떤 날은 술자리의 친구들과 철학자가 되어 인생의 정답을 찾으며 긴 밤을 지새우기도 하고. 그리고 지금은 퇴근길 버스에서 헤밍웨이가 되어 쓴다는 고독에 대해 느껴보기도 한다.


 어떤 분야의 정상이 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그 누구라도 될 수 있다.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세돌 프로가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코인 노래방에서 감미로운 성시경이 될 수도 있으며, 집에서 저녁을 만들며 집밥 백종원 선생이 될 수 도 있다.

 꼭 정상에 위치하지 않더라도 스스로가 만족만 한다면, 정상에 올라간 사람보다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굳이 한 가지만 선택해서 잘할 필요는 없다. 인생이라는 담벼락에 내가 선택한 각양각색의 페인트를 마구마구 덮어씌워도 된다. 페인트의 농도가 묽든 짙든, 색깔의 조화가 어떻든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내 담벼락이니까.

 그렇게 이곳저곳에서 찢고 오려낸 잡지와 사진 조각을 붙여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키는 콜라주 기법처럼,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던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다.

 그 모든 것들이 모여 나라는 존재를 완성시켜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나를 만들어내는 재료와 물감이 조금 더 다채로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의 저자 레오 버스카글리아Leo Buscaglia의 명언 중에 좋아하는 말이 하나 있다.


 “인생은 열정으로 많은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천국이다.”
 “Life is a paradise for those who love many things with a passion”


 잘하든 못하든 좋아하는 것에 열정을 갖고 사랑하다 보면, 그만큼 인생의 많은 순간을 더 많이 그리고 자주 즐기게 되지 않을까?

 나름대로 열정으로 다양한 것들을 사랑하고, 때론 예술가가. 어떤 날은 철학가가 된 적은 있었지만, 오늘처럼 쫄쫄이를 입은 히어로가 되어본 것은 또 처음이다.


 나를 히어로로 만들어준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그 꼬마 아이의 인생 또한 다채로운 색감 가득한 천국이 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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