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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주키 Mar 27. 2021

맥주를 마시고 싶어서 젤리를 샀다

2015 Barcelona, Spain


 퇴근길 버스에서 양팔을 들어 올려 짜릿한 기지개를 켰다. 유독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회사에서 그간 준비했던 프로젝트를 만족스럽게 끝낼 수 있었고, 무엇보다 그에 대한 압박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오늘과 같은 기분은 당분간 쉽게 만날 수 없을 거야'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생각의 끝에는 맥주가 있었다. 맥주가 있다면 조금 더 완벽하게 하루를 마칠 수 있을 텐데.


 버스에서 내려와 횡단보도를 건너, 집 앞에 새로 생긴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그 자리에는 원래 세탁소가 있었다. 늘 작은 TV를 보고 있다가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하면 화들짝 놀란 얼굴과 함께 맞아주시던 아주머니도 있었는데, 낡고 녹슨 간판은 어느새 연두색과 흰색이 뒤엉켜 청량감을 뿜어내는 간판으로 바뀌어있었다.


 아주머니의 밝은 얼굴을 생각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맥주가 있는 칸으로 걸음을 옮겨 습관적으로 맥주를 골랐다. 평소에 먹던 거친 탄산이 느껴지는 라거 맥주를 한 아름 품에 안았다가 곧바로 계산대에 내려놓았다. 

'삐빅-' 

"세계 맥주 네 캔, 만원입니다."

"아~ 잠시만요!"


 카드를 건네려는데 계산대 앞에 곰 모양 젤리가 눈에 띈다. 젤리가 “나도 데려가요”하며 손짓한다. 계산대 앞에 그토록 귀엽고 사랑스러운 곰돌이를 배치한 건 분명 상술인 것을 알고 있지만,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제일 귀여워 보이는 놈의 목덜미를 잡아들었다. 

'삐비빅-'

"만 이천 원입니다."


 소파에 누워 맥주캔을 땄다. 탁-하는 시원한 소리를 듣기 위해서 맥주를 먹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혀끝을 톡 쏘는 탄산과 목구멍의 빈틈을 부드럽게 매워주는 맥주를 깊은숨과 함께 천천히 넘겼고, 이내 하루가 더 완벽 해진듯한 기분이 들었다.

 맥주 한 모금으로 갈증을 해소하고 보니, 반투명 봉지 안에서 알록달록한 빛을 내뿜는 곰돌이 젤리가 보였다. 그 빛깔에 최면이라도 걸린 것처럼 봉투를 뜯어 곰돌이를 해방시켜주었다. 곰의 몸에서는 과일향이 났다.


 곰돌이의 최면 때문인지 아니면 과일향에 취했는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맥주 세 캔과 젤리 껍질은 비어져있었다. 평소라면 맥주 두 캔을 까서 다 먹지 않고 한 캔의 남은 일부를 싱크대에 부었을텐데, 입에서 뒹구는 과일향 곰돌이 덕분에 순식간에 세 캔을 비워버린 것이다. 

 완벽한 하루의 끝을 장식하는 주인공은 맥주가 아닌 젤리였다. 의외의 마무리였지만, 달콤한 하루를 선물해준 젤리가 고맙게 느껴졌다.


 '오랜 기간 정들고 익숙한 맥주에게 주인공 자리를 주고 싶었는데, 젤리가 갑자기 등장해서 내 마음속 주인공 자리를 꿰찼다.'는 생각에 맥주가 눈을 흘기는 것 같았다. 질투하는 맥주를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주변 사람들도 맥주와 젤리로 나눠볼 수 있겠구나."


 오랫동안 관계를 이어오며 깊은 관계가 당연시되는 '맥주'와 같은 부류, 그리고 만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생각과 취향이 비슷해서 급속도로 가까워진 '젤리'와 같은 부류. 두 가지로 충분히 분류가 됐다.


 어렸을 때는 맥주 같은 사람ㅡ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 정든 사람ㅡ과의 관계가 가장 깊은 관계라고 생각했다.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추억이 쌓이고, 이어서 깊은 관계가 탄생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물론 이렇게 될 확률이 높다.)

 하지만 관계라는 것은 자장면집 쿠폰 많이 모으는 것처럼 단순하지는 않아서, 오랜 시간을 보낸 친구와 깊은 관계 대신 깊은 감정의 골짜기에 빠질 수도 있는 법이다.

 반대로 만난 지 오래되지 않아서 스쳐 지나갈 인연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ㅡ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 직장 동료 등ㅡ과는 오히려 인생에 힘이 되는 찐한 우정을 이어나가기도 한다.


 이렇듯 관계는 시간에 비례하지 않아서, 처음부터 '우리의 관계는 여기까지.'라고 선을 긋거나 함부로 평가하긴 어렵다.

 그렇기에 우리는 관계가 맺어져 감정이 공유되고, 함께 나아가는 순간순간을 소중하게 대하며 진심을 쏟을 필요가 있다. 커피와 함께 할 때면, 그의 내면을 커피로 가득 채워 넣는 일회용 빨대처럼 말이다.


 오랫동안 좋아했건 그렇지 않던, 관계의 무게에 대해 쉽게 평가할 수는 없다. 맥주는 맥주대로, 젤리는 젤리 나름대로 소중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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