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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주키 Mar 27. 2021

우리는 우리가 듣고 싶은 말을 건네곤 한다

2015 Camel with Sunset, Essaouira, Morocco

 퇴근길 초승달이 나뭇가지 위에 걸터앉아 있던 것처럼, 집에 도착하자마자 소파에 턱 하니 걸터앉았다. 별일 없는 하루였는데 그 하루가 사막같이 느껴지던 날이었다.

 사막을 찾아온 건지, 나에게도 낙타 한 마리가 찾아왔다. 그러곤 곧바로 목구멍 중턱에 자리 잡아 앉아버렸다. 침을 넘길 때마다 목젖이 움직이는 건지, 아니면 낙타의 등딱지가 피부 표면에 드러나 요동치는 건지 알 길은 없었으나 목 안의 건조한 무언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사실 목안에 있는 게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다. 그저 시원하게 목 안을 적실만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이 상황에서 뭐가 필요한지 확실히 알고 있다. 

 ‘지금은 맥주가 필요하다. 그래, 내 목에 단비를 내려주자’


 맥주 생각에 피곤함은 잊은 채, 앞 구르기와 비슷한 동작으로 재빨리 소파에서 내려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 속을 온통 오렌지 향이 나는듯한 어두운 주홍 불빛에 비춰 들쑤셔보지만, 맥주는 보이지 않는다. 분명 여러 나라 출신의 맥주 캔들이 나뒹굴고 있어야 하는데, 누군가에게 침략당한 요새처럼 텅- 비어있다.(집에서 맥주를 마시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


 한번 집에 들어오면 다시 나가지 않는다는 나만의 원칙이 있었으나 목구멍에서 발광하는 낙타를 해치워야 잠들 수 있을 것 같아 결국 편의점으로 몸을 돌린다.

 투명 케이지 속 애완동물을 입양하듯, 한참의 고민 끝에 4개국의 맥주를 애지중지 데려온다. 4개국을 손안에 넣었으니, 맥주 마실 명목이 더욱 뚜렷해진다.

 “에헴, 자! 이제 축배를 듭시다!”


 아차, 아직 축배를 들긴 이르다. 쾌감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는 기다림이 조금 더 필요하다. 맥주가 냉동실에서 닭살을 돋우며 몸을 식히는 동안, 나는 몸에 뜨거운 물을 끼얹는다.

 샤워기를 뚫고 나와 지구의 중심을 향해 쏟아지는 물줄기를 가로막고 있으니, 온통 낙타에 쏠려있던 정신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고작 맥주 네 캔에 영토를 점령한 왕처럼 군림하려고 했으나, 목구멍 외의 다른 지역은 전혀 신경 쓰지 못하는 무능한 왕임을 깨닫는다.

 거울을 보니 눈가에 갈라진 지역에 통곡의 소리가 들린다. 여러 가지 촉촉한 것들 ㅡ스킨, 로션 그리고 서른이 되고부터 바르기 시작한 아이크림.ㅡ 을 유화물감 바르듯 덕지덕지 쌓아 올린다. 

 

 이젠 정신이 완벽히 돌아왔는지, 내일 일기예보까지 궁금하다. 핸드폰을 꺼내 한국적 정서의 이름을 가진 개인 비서에게 “실이야! 내일 날씨 알려줘”하며 외쳐보지만 그녀는 응답이 없다. 

 “아... 퇴근 시간이 지나고 나서 일을 시키다니, 나도 참.” 

 혼잣말로 민망함을 감추며, 손으로 핸드폰을 꾹꾹 눌러 일기예보를 검색한다. 내일 비가 온단다. 내 목과 함께 내가 사랑하는 도시, 서울이 젖어가는 것을 상상하니 이제 더 이상 맥주를 참을 수 없다.


 안주 대신 틀어놓은 빌 에반스Bill evans의 재즈 선율에 맞춰 격렬하게 캔의 머리채를 잡아 재낀다. 그러곤 내심 미안해서 사과의 의미로 가볍게 입을 맞춘다.

 그 순간 거부할 틈도 없이 식도를 따라 흘러들어오는 진한 향과 목젖을 강타하는 탄산의 농도에 정신을 잃는다. 청량함이 머릿속을 가득 매운 그 순간, 핸드폰이 울린다.


 한동안 연락하지 않아, 메신저 속 저- 깊은 우물 아래 자리 잡았던 동갑내기 친구의 이름이 수면 위로 올라온다. 이름 세 글자에서 소주 냄새가 난다. 


 ‘야, 봉준호 감독 기생충으로 상 받은 거 봤어? 너무 멋있지 않냐.’

 ‘나도 얼마 전에 시상식 봤다. 멋있더라.’


 맥주와의 시간을 방해받는 게 싫어서 대충 답장을 보냈는데 웬걸, 이 친구 눈치는 없고 진지하다. 


 ‘좋아하는 일에 대해서 작년까지는 조금이라도 노력하곤 했는데, 이젠 못하겠다. 너무 멀어졌어, 멀리 왔어. 지금 다시 하면 너무 늦은 거겠지? 나 이젠 어떻게 살아야 하냐.’


 어설픈 위로는 오히려 감정의 역류를 불러일으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조만간’이라는 말로 다음 시간을 기약하고 싶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늦었다.”는 친구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 반박하려고 답장을 보낸다.


 ‘아직 늦지 않았어. 네가 지금까지 해온 대로 계속하다 보면 조금씩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라고 답장을 보내곤 맥주 한 모금을 삼키는데, 탄산이 올라와서 그런지 코끝이 찡하고 마음이 간지럽다.


 ‘이 녀석이 친구들에게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들을 토해냈을까. 아무리 많은 사람들과 얘기했더라도, 마음은 여전히 무겁겠지.’

 자주 연락하지 않았더라도 친구의 상황과 마음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된다. 결국 맥주와의 시간은 잠시 뒤로 젖혀두고 전화를 건다.


 나무에 걸려있던 초승달은 어느덧 나뭇가지를 발판 삼아 저 위로 튀어 올랐다가 다시 내려갈 채비 중이다. 신비로운 달빛도 지구 중심을 향해 마구 내달리는 하늘 아래, 우리가 나열한 위로의 단어들이 아름답게 줄을 선다.

 수화기 너머 소주 냄새가 나는 친구는 볼 순 없었겠지만, 밤하늘 아래 달빛과 어울릴만한 단어들을 골라내는 동안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 몸의 수분은 지구 중심을 향하는 샤워기의 물이나 달빛과는 달리, 눈동자 속 블랙홀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보니, 내가 뱉은 말들은 사실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위로가 되고 싶어서 뱉은 단어들이 오히려 사막 같은 내 마음을 따뜻하게 적셔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사실 우리의 고민들은 어느 정도 비슷한 맥락 속에 있다. 우리의 고민들을 각 특성에 맞춰 상자에 나눠 담아보면, 몇 상자 나오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든다. ㅡ예컨대 사랑과 이별, 미래와 진로, 경제적 문제.

 결국 ‘위로를 한다’는 말은 ‘위로를 받았다’는 말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위로는 절대로 일방통행이 될 수 없고 양쪽이 맞닿은 면에서 스파크나 어떠한 소름을 일으켜내는, 어릴 적 우리가 가지고 놀던 풍선과 풍선 사이의 정전기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동안 목 안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익숙해져 버린 낙타가 잠에서 깼는지 다시 울부짖는다. 고개를 뒤로 넘겨 얼마 남지 않은 맥주를 털어 넣으며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가 듣고 싶은 말을 건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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