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똑-'
노크소리에 이어 똑딱이는 파장을 일으키며 대학생 셋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삼 년 전 내 모습이 생각 나서였을까, 아니면 학교 후배들이어서 그랬던 걸까? 어디선가 애틋한 감정이 밀려왔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15분, 내가 입사 비법서라도 엉덩이에 깔고 앉은 것처럼 무언가 알아내려는 질문이 끊기질 않는다. 바위처럼 우뚝 솟아있는 검은 머리들 사이로 메아리가 울려 퍼지다가, 바위 하나에서 폭포수처럼 여러 마디의 말이 쏟아져 나왔다.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말하셔도 됩니다."하고 말하려다가 목젖 아래 숨겨놓은 단어들을 꺼내지 못했다. 다음 차례의 학생을 위해 제시간을 지키려는 배려의 모습과 짧은 시간 동안이라도 무언가 얻어가겠다는 열정적인 모습이 섞여서 꽤나 멋있는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학생이었을 때만 해도 캠퍼스 리크루팅을 들으러 오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많지 않았다. 그동안 무슨 메뉴를 개발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맛집의 점심시간처럼 문 너머에는 줄이 길게 늘어져있었다. 앞으로도 점점 길어질 것 같은 줄을 보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줄마저 이렇게 길면 요즘 대기업의 문턱은 어떨까? 아마도 문 앞에 스카치테이프로 '재료 소진'이라고 적힌 종이를 덕지덕지 붙여도 식당 안으로 발을 들일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그런 맛집과 비슷하겠지.'
점점 업그레이드되는 취업난으로부터 파생된 불쾌한 인기를 누리며, 상담을 진행하는 동안 친한 동생 G에게 연락이 왔다.
'끝나고 광화문에서 차 한잔?'
아마도 그는 내가 SNS에 올린 '#캠퍼스리크루팅,#놀러와요'라고 적혀있는 해시태그를 보고 연락을 한듯했다.
G는 광화문에 위치한 글로벌 기업에서 계약직 사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번이 그의 두 번째 회사였다. 공대를 졸업한 나와는 달리, 내로라하는 명문대 마케팅 학부를 졸업한 그는 정규직 전환에 한번 미끄러진 후로는 딱히 좋은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지켜지지 않을 달콤한 말을 연신 내뱉는 직장상사의 뱀 같은 모습에 실망했다는 이야기가 그에 관한 가장 최근 소식이었다.
G가 지금 일하는 회사 일층에는 내가 대학생 때부터 자주 가던 카페가 있었다. 프랜차이즈 카페인데도 자주 찾았던 이유는 역으로부터 거리가 떨어져 있어 한적했고, 높은 천장과 통유리로 되어있어서 창 밖의 경복궁 지붕 너머로 해지는 것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공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일층 카페에서 기다릴게, 퇴근하면 내려와!'
G가 보고 싶기도 했지만 카페도 가고 싶어서 흔쾌히 그를(그리고 커피를) 찾아 나섰다.
사실 오랜만에 모교를 방문한 터라 조금은 더 머물고 싶었으나, 알록달록 반짝이는 후배들 사이에서 빛바랜 회색의 내 모습이(물론 학생들 눈에는 오히려 빛나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눈에 거슬릴 것 같아 재빨리 버스로 이동했다.
버스는 북한산이 하늘에 그려놓은 거친 선을 따라 이동했다.
건물 안에 변호사가 많이 앉아있을 것 같은 평창동, 작은 가게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는 부암동, 그리고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 언덕을 내려오며 서울을 내려다보니 서울의 지붕 위로 추락해, 부서지는 여름의 햇살이 그 파편을 마구 튕겨내는 것이 보였다. 눈이 부셨다.
햇빛 덕분에 잠시 눈을 감았다 뜨니, 어느덧 눈앞에 광화문이 나타났다. 광화문이 시야에서 완벽히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쳐다봤다.
'어떻게 봐도 봐도 질리지 않을까?'란 생각을 하며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더운 날씨 탓에 마치 버스에서 발사한 총알이라도 되는 것처럼 카페로 튕겨져 나갔다. 오랜만에 입은 하늘색 스트라이프 셔츠를 젖게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덜거덕 덜거덕-'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받아 들자마자 목구멍 안으로 쏟아붓고, 얼음만 남은 투명한 유리잔을 바라보았다.
무언가가 가득 차 있어야 하는 곳에 얼음만 덜거덕 거리는 게 평소와는 달리 공허해 보였다.
자꾸 그 공허한 얼음이 눈에 거슬려, S E L F라는 알파벳이 정갈하게 적힌 탁자로 다가가 유리잔에 물을 따랐다. 그제야 얼음은 물과 뒤섞여 안정적으로 느껴졌다.
돌아와 자리에 앉으려는데, 누군가가 어깨를 툭-쳤다. 내가 온다고 평소보다 빨리 퇴근한 G였다.
G는 오자마자 커피를 주문했고, 이어서 진동벨이 울렸다. 우리는 그게 출발 신호인 것처럼 대화를 시작했다.
우리가 만나지 못한 시간 동안 서로에게 벌어진 사건들을 나열해냈고, 중간중간 우리가 함께 보낸 추억들을 끼워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주요 사건들이 퍼즐처럼 정리되고 나니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하루 종일 진심을 다해 상담을 하고 왔으니 어쩔 수 없을 노릇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G의 얘기에 집중하고 싶어서, 얼음이 들어있던 유리잔을 볼에 가져갔다. 그런데 아까 보였던 공허한 얼음은 이미 녹아 사라지고 없었다.
피곤한 것을 눈치챘는지, G가 비장의 무기처럼 연예면 기사의 헤드라인과 같은 자극적인 한 마디를 꺼냈다.
"나 이제 그만하고 방울토마토 농사 지을래."
정직원은 아직 못됐지만, G는 멋지게 자기 자신만의 커리어를 이어나가고 있었고, 낮에는 일. 밤에는 영어회화. 주말에는 제2외국어 및 각종 자기 계발까지. 그날 낮에 만난 학생들보다(물론 너무나도 주관적인 평가라 죄송합니다.) 훨씬 구체적이고 열심인 G였는데, 갑자기 방울토마토라니.
"야 G, 갑자기 방울토마토? 농사? 그게 다 무슨 소리야?"
녹아 사라진 얼음 걱정을 하다가, 혹시라도 내가 놓친 게 있어서 되물었다.
"아니, 아무리 내가 노력해도 계약직의 늪에선 벗어나기 어려울 것 같아... 뭐라도 결실을 맺고 싶은데, 그건 농부가 제일 잘하는 일이니까. 이왕 내가 좋아하는 방울토마토로 농사나 해볼까 싶어서."
G에게 어설픈 위로보다는 그저 들어주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 같아 G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이야기한 후 당근 모양 초콜릿이 올라간 케이크를 주문했고, 케이크가 얼음과 함께 사라지는 동안 G와의 대화를 계속 이어나갔다.
G와 헤어지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오후에 나 스스로를 회색빛이 난다고 생각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G와 마찬가지로 '결실의 부재'가 원인이었다. 기업에 소속되어 일을 하더라도, 경제적 보상 외에는 그렇다 할 결실이 따로 없어서였다. 그러고 보니 결실이라는 단어에 대해 고민한 게 언젠지 까마득했다.
버스를 타고 모교에 다녀오는 길이라 그런지, 결실에 대해 고민하던 대학시절이 떠올랐다.
공대생이던 내가 시험공부나 과제 때문에 밤늦게까지 집에 가지 못하고 지칠 때면, 우리 학부에 바로 옆에 붙어있던 예술대학 건물로 놀러 가곤 했다. 내가 하고 있던 공부는 직관적으로 눈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예대생들이 하는 작업은 결과물이 바로 눈에 보였다.
그들이 만들어낸 미완과 완성의 오묘한 경계에 있는 작품들을 보면서 ‘내가 하고 있는 것들도 저 작품처럼 결실을 맺고 있겠지.’라는 생각을 했다. 대리만족이었다.
돌이켜보면 눈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혹은 그렇다 할 보상이 없어서 강렬한 쾌감을 느끼지 못한 일들이 수두룩하다. 그래서 스스로를 색이 없는 사람이라고 느끼거나(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돌이켜보면 내가 하고 있는 것들과 G가 이뤄낸 것들 모두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미대생의 작품, 혹은 무용수의 안무처럼 무형의 결실을 맺어가고 있었다.
그날 G에게 '네가 만들어나가고 있는 보이지 않는 결실들은 방울토마토의 그것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더 크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었지만 하루 종일 학생들과 말을 주고받으며 에너지를 다 써서 그랬는지 일찍 잠이 들어 말하지 못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기업에서 세 번째 계약직 업무를 하던 G에게 연락이 왔다.
다섯 음절의 카톡이 도착했길래, 당연히 ‘방울토마토’인 줄 알았는데,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여태껏 보지 못한 통쾌한 다섯 글자가 들어있었다.
"정규직 전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