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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주키 Mar 27. 2021

소개팅에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사람이 나왔다

2015 Sahara, Morroco

 "네가 평소에 말한 이상형이랑 똑 닮은 사람을 발견했어."
 사무실에 앉아있는데 내 마음 깊은 곳까지 들여다볼 수 있을 있을 만큼 친한 친구 녀석에게 카톡이 왔다. 
 "응? 누군데?"
 "내 지인의 지인의 지인인데 소개팅이 들어왔어! 근데 정말 네가 좋아할 만한 사람인 것 같아."
 그런 사람이 없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심지어 지인도 아니고 지인이라는 단어가 몇 번이나 나오는 먼 사람이라니.) 사무실 키보드를 연신 두들기며 지을 수 있는 최대치의 무표정으로 답장했다.
 "호들갑 떨지 마."

 어렸을 때는 분명 환상의 그녀가 어딘가에 존재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고 경험치가 쌓일수록 환상 속의 그녀는 머릿속에만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소개해준다는 친구 녀석은 단 한 번도 나에게 소개를 해준 적이 없었다. 왜냐면 나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그때 핸드폰 진동이 한번 더 울렸다.
  ‘@‘가 붙은 영어단어다. 인스타그램 아이디였다. 그토록 나를 잘 아는 그 녀석이 쐐기를 박는다.

 SNS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보여주지 못한다. 자기가 보여주고 싶은 것들만 올린다. 그 사람의 모든 걸 대변하지 않고, 현재 그대로의 모습보다는 되길 바라는 모습이 투영되어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직접 본다고 한들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을까?

 개인마다 바라보는 ‘인상적인’ 부분이 모두 다르고 어디서 그 사람을 만났는지, 혹은 그 사람의 평판 같은 것들로 그 사람의 이미지를 결정하려고 하기 때문에 어치피 우리는 그 사람이 드러낸 의도적인 부분만을 알 수 있다. (콩깍지가 씌여있으면 더 심하다.)

 그렇기 때문에 SNS를 보고 너무 성급하게만 판단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소량의 고급 정보를 참고할 수 있다. (말은 거창하게 했지만, 사실 얼굴이 들어있는 사진을 볼 수 있다는 게 가장 크다.) 

 어쨌든 못 이기는 척 인스타그램에 접속해서 비겁한 눈을 가늘게 뜨고 사진을 내려보았다. 네모 반듯한 여러 장의 사진에는 동그란 단발머리의 여자가 웃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어렸을 때부터 단발머리 한 이성을 보면 눈이 돌아가곤 했다.) 그리고 내가 자주 방문하는 광화문 카페와 유튜브에서 좋아요를 누른 ‘Make it better’이라는 노래도 그 네모난 사진 안에 들어있었다. 심지어 공대생인 내가 전과를 고민했었던 광고를 직업으로 하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Y였다.
 사진 속 그녀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했고, 아까와는 다른 숨길 수 없는 표정으로 친구에게 고맙다고 답장했다.

 일주일이 지나고 Y를 만났다. 그녀가 일하는 강남역과 양재역 사이 골목에 있는 우동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소개팅도 오랜만이었지만, 우동집 소개팅은 또 처음이었다. 시간이 맞아서 만난 거지, 그날 만나기로 미리 약속한 것도 아니었다. 평소 같았더라면 깔끔한 옷차림을 준비했을 텐데, 갑작스러운 약속에 더벅머리에 모범생 같은 카키색 니트를 입고 그녀를 만나러 갔다.

 우동집은 한 상가 지하에 숨겨져 있는 맛집인 듯했다. 평일 저녁인데도 퇴근 후 우동과 맥주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주황빛 조명 아래 테이블 두 개가 들어가 있는 작은 방으로 안내받았고, Y가 오는 걸 어색하고 바보처럼 쳐다보는 모습을 첫인상으로 느끼게 하기 싫어서, 벽을 향해 앉아 메뉴판을 살펴보았다. 우동 한 그릇에 인생을 담았다는 우동 외길 스토리로 메뉴판은 시작되어 있었다. 근처 회사에서 회식을 온 것 같은 옷차림으로 앉아있는 손님들의 웅성거림이 동굴의 울림처럼 주황 조명을 타고 내가 앉은 방 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이상하게도 그 울림 때문인지 내 심장도 진동하고 있는 듯했다.

 십 분쯤 지났을까, 야근을 마친 Y가 등장했다. 
 “많이 기다리셨죠?”
 “아뇨, 조금 전에 왔어요”
 나는 맥주와 일본식 우동 나베, 그녀는 냉우동을 시켰다. 대화를 하는 동안 내가 무슨 얘기를 한 지 기억나지 않지만(덤덤한 척했지만 은근 긴장했다.) 그녀는 SNS에서 본 것보다 더 멋있고 매력적인 사람인 것 같았다. 우동을 다 먹고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소개팅을 무사히 마쳤다.

 헤어지고 다음 날 까지는 Y와의 느낌이 좋았다. 적당한 대화 속에서 서로 호감을 표현했던 것 같았다. 며칠 후에 Y는 휴가를 내고 파리 여행을 떠났는데, 그 후로 그녀와의 연락이 뜸해졌다. 파리에 가 있는 동안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굳이 연락하지 않았고, 파리 여행이 끝난 후 연락을 이어간 Y는 소개팅에서 먹은 냉우동처럼 냉랭해져 있었다.

 소개팅에서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상대가 나왔고, 앞으로 이렇게 마음에 드는 상대가 나올 확률은 0%에 가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말 그대로 무작정 들이댔다. 
 그러나 파리에서 돌아온 그녀와 나 사이에는 바게트처럼 딱딱한 벽 같은 게 느껴졌다. 파리에 다녀와서 만날 그녀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기다리면서 했던 기대와는 달리 그 후로 Y를 만날 수 없었다.

 사실 평생 몇 번 없을 확률을 가진 사건이 갑자기 등장하면, 심리적으로 좋은 결말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상상했던 결말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일이 흘러간다면, 큰 기대만큼의 실망과 아쉬움이 몰려오게 된다.
 기대했던 Y와의 관계 또한 혼자만의 짝사랑으로 완전히 종결된 후에 한동안 실망스러운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감정에서 벗어나게 해 준 것은 ‘사하라 사막’이었다. 
 내가 사하라를 가게 된 것은 유럽여행을 끝마치고, 남은 돈을 가지고 어디를 갈지 고민하던 찰나에 핀터레스트Pinterest에서 사진 한 장을 발견하고 결정하게 되었다. 사하라의 밤하늘이 담긴 사진 한 장이었다.

 그 사진을 보고 2주일간 100만 원도 채 되지 않는 돈으로 모로코 일주를 시작했다. (모로코 여행자치곤, 굉장히 적은 돈이다.) 특별한 계획은 따로 없었고, 그저 여행 중반쯤 사하라의 게르Ger에서 하룻밤 묶으며 사막의 하늘 밑에서 목이 아프도록 별을 올려보는 게 내 주된 계획이었다. 
 적은 돈에 미지의 지역을 계획도 없이 갔으니 고생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사하라의 밤하늘에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별을 두 눈에 담고 싶어서 기대하며 여행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내가 찾은 사하라 사막의 밤은 구름에 가려져서 눈을 감은 것처럼 온통 검은색이었다. 무척 절망적이었다. 
 누워서 하늘을 보는데 귓가를 맴돌던 모래바람이 ‘이게 네 앞 날이다. 임마!’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얄미운 모래를 귀에서 털어내고 일어나니, 어두운 사막의 밤도 그 나름대로 아름다웠다. 사하라에서 만난 친구들과 언덕 위에서 핸드폰 플래시를 켜고 데굴데굴 굴러 내려오거나, 플래시를 한 군데 모아 하하호호하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밤하늘에만 별이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이 우주를 맴도는 별이 된 기분이었다.

2015 Star on the desert, Sahara, Morroco

 생각해보면 우리가 기대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을 때 조차도 기대했던 바를 완벽하게 충족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또한, 기대했던 일들에 대해 우리가 쏟아부을 수 있는 노력과 시간은 한정되어 있기에, 우리 삶에는 생각했던 것처럼 되지 않는 것들이 더 많고 실망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삶이 그렇게 설계된 것은 아마도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인생이 늘 생각한 대로만 돌아간다면 그다지 재미없을 것 같다. 치트키를 쳐서 아무리 공격받아도 죽지 않는 불사의 몸으로 게임을 하는 것처럼 처음에는 재미를 느껴지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떤 보람과 성취도 느끼지 못해 금방 질리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뜻밖의 상황과 반복된 좌절 혹은 성취를 통해 성장을 거듭하고, 삶의 영역을 조금씩 조금씩 넓혀나간다.
 ‘아 이게 뭐야. 왜 나한테 이런 일이 벌어지지?’하는 순간에도 그 사건은 생각지도 못해온 어딘가 가려웠던 삶의 구석구석을 긁어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하라 사막의 밤처럼 Y를 만난 후로 분명 배운 것들이 많이 있었다. 이를테면 타이밍이 중요하다던지, 일방적인 관심 표현은 폭력이 될 수도 있다던지.
 Y덕분에 잊고 있던 사하라의 밤을 떠올렸다. 그리고 오래된 기억이 말해주었다. 
 기대와는 다른 결과와 상황들을 마주하는 우리는 분명 잘 해내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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