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블라디보스토크의 해는 창창하다. 떠나갈 때의 하늘과 닿을 때의 하늘이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그저 안전하게 내렸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할 뿐, 아직은 여기가 어딘지 실감하지 못한다. 단지 미지의 땅으로 다시 건넜을 뿐이라고만 여긴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번에도 쫓기듯이 떠나왔다. 바이칼호를 다룬 한두 권 그리고 러시아 문화를 담은 기행문 한두 편 본 게 다였다. 그렇다고 여행의 동선에 필요한 정보를 족집게로 뽑아낸 것도 아니다. 그곳으로 떠나니 무작정 집어든 책이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언어도 다르고, 더군다나 짧은 영어도 잘 통하지 않는 불확실한 세계로 어린 아이들까지 데려가면서도 이렇게 무방비할 줄이야.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두려워하지 않고 매 시간을 헤쳐 나오며 즐겨야 한다.
따지고 보면 완벽한 준비가 되어야 떠날 수 있다는 말은 불안을 다스리는 일종의 진정제였을 뿐이었다. 휴식이 필요하다면 일단 분리되어야 옳다. 우리 가족의 지난 여행들도 이처럼 무모한 분리가 없었다면 가능하지도 않았으리라.
시골 공항 같은 분위기에 적응해 가면서 입국 수속을 마쳤다. 모든 해외여행길이 그렇듯이 우리의 첫 번째 임무는 현지 유심칩 구매였다. 머리 스타일만큼은 빅뱅의 지드였던 ‘꿀벌’ 통신 가게 청년의 안내로 수월하게 미션을 완료한 후 공항을 빠져 나오니 어떤 관광객이 함께 기념사진을 찍자며 다가왔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리에게 첫 번째로 말을 건 이 남자. 아마도 러시아인은 아니고 유럽의 어느 배낭여행객쯤으로 보였는데 그제야 우리는 실감했다. 드디어 러시아에 도착했구나! 새로운 여행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한껏 부풀어 오르는 순간이었다. 곧바로 푸른 빛이 아름다운 공항청사를 배경으로 첫 번째 가족 사진을 남겼다. 물론 찍사는 말을 걸어온 그 남자였다.
아쉽게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추억은 여기까지다. 이제 우리는 시급히, 공항을 떠나 중앙역으로 가야한다. 바로 시베리아횡단열차에 탑승해야 하기 때문이다. 3박 4일간 달려 다음 행선지인 이르쿠츠크 역에 우리를 데려다 줄 열차시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껏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바라는 활동을 해오면서 열차타고 유럽여행가자는 말을 수십 번은 한 것 같다. 장장 9288km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시베리아횡단열차를 염두에 둔 말이었다. 그랬던 내가, 진짜 세계여행객의 로망이라던 이 열차를 탄다고 생각하니 꿈인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