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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영우 Dec 26. 2020

시베리아 횡단열차 탑승!


순조로움의 이면 

   

모든 게 순조롭게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어느새 해는 뉘엿뉘엿 기울어 어둔 땅거미가 공항 앞 광장을 휘감을 듯 다가서고 있었다. 빨리 택시를 타야 할 상황이다. 우리가 공항에 내린 시간에는 중앙역으로 가는 공항철도도 버스도 모두 끊기기 때문에 공항 안의 콜택시 부스를 통해 안내받아야 한다는 정보를 되새김질하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걸어갔는데.    


“No”    

  

아뿔싸, 그냥 이 한마디였다. 막무가내 이게 다였다. 설명도 없다. 아니, 러시아말로 계속 툭툭 던져대는데 알 길이 없었던 게다. 보자 하니 콜택시 업무가 끝난 듯 했다. 허허발판 같은 공항 앞에는 대기하는 택시도 없었다. 몇몇 일행들이 택시를 잡기 위해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    

예약한 열차 출발 시간까지는 약 1시간 30분 남짓, 이곳에서 그곳까지 넉넉히 1시간은 타야 닿을 수 있는 상황 앞에 순간적으로 우리는 온통 노래졌다. 순조로웠던 게 아니라 우리 앞에는 결정적 시련이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유심칩을 사는 줄이 너무 길어 오래 기다린 게 탈이었다. 아름다운 공항청사를 눈에 담느라 이곳저곳 거닐어본 게 사치였다. 세계인들이 오고가는 공항인지라 대기하는 택시들이 많겠거니 방심한 게 문제였다. 아니, 택시를 쉽게 탈 수 있다는 막심 어플이라는 휴대폰 앱을 미리 준비하지 않은 게 결정적 실책이었다.    


10분 안에 택시를 타지 못하면 애써 거금을 들여 예약한 열차 티켓이 무용지물 될 수도 있는 상황. 로망이니 뭐니 할 것도 없이 모든 게 산산조각이다. 이 사태의 책임을 놓고 극심한 부부싸움이 일어날 것이고, 실망한 아이들을 달래려 이 평범한 도시로 나가 아이스크림이나 사 주며 시간을 보낼지도 모른다.     

누구나 지금껏 살아오면서 한번쯤은 열차 티켓을 놓친 적이 있을 것이다. 여유롭게 나섰는데 천재지변 같은 일로 종치게 된 경우가 아니라 늑장부리다 날려먹은 일들이 내게도 많다. 이런 단순한 상황이, 그러나 가족과 함께 해외로 나선 자유여행에서 겪게 되면 위기로 격상된다. 안전을 책임진 아빠로서, 정말이지 하늘이 노래보였던 순간이었다.        



구세주    


그런데 때마침 녹색으로 랩핑된 도요타 택시 한 대가 우리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더니 택시를 잡으려는 여러 무리 중에서도 우리 가족 앞에 떡하고 섰다. 이때다 싶어 구글 번역기로 역 명을 보여주었지만 모르겠다며 딴 승객 쪽으로 가려고 했다. 무작정 붙잡았다. 이번에는 러시아 여행 책에 나오는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타란다. 가슴을 태우며 애들을 태웠다.    

영어가 전혀 안 통했지만 탑승에 성공하게 되니, 나도 모르게 “스파시바, 스파시바(고맙습니다)”를 반복했다. 그 기사는 별 일 없다는 듯 쳐다보며 어깨를 갸웃했고 내 마음을 알아주는지 빨리도 달려주었다. 또 알아듣지도 못하는 러시아말로 어떤 건물에 대해 설명해주었는데 가만히 보니 현대호텔이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그가 한국인인 우리 가족에게 따뜻한 인사를 건네는 방식이었다. 나중에도 여러 번 느꼈지만 러시아 사람들은 무뚝뚝한 것 가운데서도 친절하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면 그 택시기사는 우리 가족에게 구세주였다. 여행기들에서 간혹 읽게 되는, 급해서 탔더니 바가지 택시였다면 어찌 되었을까. 이리저리 빙빙 돌다가 열차도 놓치고 차비만 억울하게 무는 꼴이란,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다. 어쩌면 이번 바이칼여행의 가장 결정적인 장면은 바로 그 녹색택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출발지, 블라디보스토크 중앙역

러시아 할머니와 할아버지    


드디어 중앙역에 도착했다. 짐에 대한 보안검사를 받고나서 어디로 가야 하나 또 이리저리 헤맸다. 주로 할머니들과 할아버지들이 역무를 담당하고 있던데 역시나 무뚝뚝해 말 걸기가 무안할 정도다. 사실은 무안함을 넘어 약간의 공포심까지 느꼈다. 고풍스러우나 음침함이 서려 있는 중세 유럽의 저택 같은 곳에서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노인들이 바로 앞에 있다고 생각해 보라. 말을 걸었더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에도 미소는커녕 서슬 퍼런 냉기만이 가득 차 있다면 어떤 느낌일지 상상이 가리라. 그래도 나는 우리 가족의 안전한 여행을 담당하고 있는지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상냥한 얼굴로 말을 걸어야 했다. 최대한 그들 가까이 가서 눈빛을 마주하고 티켓을 보여주며 온갖 몸짓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지 가르쳐달라고 했더니 마침내 반응이 왔다.

무표정하지만 무언가를 제대로 설명하려는 고마운 반응이다. 그런 몇 번의 시도 끝에 겨우 1번 트랙 위치를 알아냈다. 이제 열차 티켓에 인쇄된 호차와 호실을 찾아가기만 하면 된다.

다시 안도한다. 준비되지 않은 여행, 그러나 우리 가족은 또 서로를 믿으며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간다.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출발하는 블라디보스토크 중앙역
저것이, 시베리아 횡단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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