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수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다은을 이해해보고 싶어 졌다. 곧장 다은을 달래어 경선과 변호사를 만나고 그 아이를 이해하고 원만히 일을 풀어나갈 용기가 생겼다.
찬송가가 오르간에서 울려 퍼지는 주일의 고요한 아침을 깨트리며 헐레벌떡 들어온 J형제, 문을 급히 열고 들어오며 거칠게 단상을 향해 소리친다.
“ 목사님! 목사님! 그 새끼가 사기를 쳤어요, 아셨어요? 김장호 말이에요.”
자리에 앉아 예배 시간을 기다리던 많은 눈들이 그에게 쏠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치수가 단상에 앉았다가 다급하게 물었다.
“형제님 무슨 일이지시죠?”
“그 개새끼 김장호가 사기를 쳤다고요, 내 돈 들고 튀었어요. 미국 올 때 가져온 내 전 재산을요!”
평소에 그렇게 점잖던 J형제가 분노에 찬 욕으로 김장호를 찾으며 두 눈에선 눈물이 어느새 창백해진 얼굴을 타고 내렸다. 모든 것이 끝난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 형제님,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치수는 그를 일으켜 세운다.
멀리 떠나 온 곳에서 같은 출신의 나라. 고향, 학교는 특별한 신분이 보장되는 통행권처럼 서로를 막무간에로 믿게 만들며 끌어당기는 자석처럼 힘이 있던 그 시절이었다. 대체로 LA의 날씨처럼 모든 게 좋았지만 서로를 믿었다가 교회 앞마당에서 흔적 없이 사라진 동포를 찾으며 멱살잡이 나는 날도 있었다. 결국 이런 일들 때문에 부동산거래나 직업을 구할 때도 오히려 유대인 중개사를 찾아봐달라며 쉬쉬하며 따로 일을 진행하는 경우도 우후죽순처럼 생겼다. 아파트 매니저 일을 하느라 기본이상의 영어 대화능력이 필요했던 경선과는 달리 치수는 간단한 영어 이외에는 따로 공부하지 없었다. 한인타운에서 목회를 했고, 한국인들과 끈끈하게 유대를 맺어가고 싶어 했다. 교회 신도의 가족이 인근의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가는 날이었다. 신도 몇 명과 치수는 그들의 이사를 종일토록 도왔다. 이사를 보내고 난 후 지쳐 돌아와서는 옷을 갈아입으며 말했다. 그는 입으로만 감사를 말하는 신도에 대해 실망을 표했다.
한동안 목사 딸 다은의 이야기는 이민사회에 안주처럼 등장했고, 그러는 사이 치수와 다은의 화해는 미뤄지고 시간은 무참히 흘렀다. 다행히 그 이후로 다은은 더 이상 문제를 만들지 않고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특히 원래 그림에 소질이 있었는데, 미국에 와서 두각을 보였을 뿐 아니라 수학은 최고점을 받았다. 딸이 졸업식에서 우등생으로 졸업하게 되면서 짧은 감사의 말을 간증처럼 전하는 모습을 보며 미국에 오길 잘했다고 거듭 생각했다. 경선은 마치 자신이 우등생이 된 것처럼 다은을 안고 울음을 토했다. 보람은 그런 것이라고, 자신의 이십 년을 송두리째 가져가고 얻은 결실이 꽃이 피어나듯 보상이 되었다고. 치수만 보고 살았다면 진작에 한국에 들어왔을지도 모른다고. 그런 생각을 할 때 경선은 성취감을 느꼈다.
경선은 <미스터 선샤인> 드라마를 보고 또 봤던 적이 있었다.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지만 존재했는 의병들의 이야기를, 드라마를 보며 우리 민족 누구보다 강하다고.' 역시 내 딸, 우리들의 조상들은 대단하다고, 다은아, 그거 아니? 그때 이름도 남겨지지 않은 의병들이 독립을 위해 싸웠단다. 다은이도 분명히 그런 훌륭한 자손일 거라고,
경선은 자신이 해방되는 걸 꿈꿨다. 목사님 사모님이 아니라 조경선으로서의 독립된 삶을, 그것도 내 고향에서 누리고 싶었다. 드라마에서 이병헌이 조선으로 소풍을 떠나는 마음을 자신의 일처럼 상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