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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읽는 호랭이 Feb 17. 2024

[서평] 하이데거 이해의 실마리가 되는 평전

뤼디거 자프란스키,『하이데거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다른 작가들이 쓴 한 인물의 평전을 읽는 것이 도움이 될까 고민이 깊었지만, 역시 저자가 다르면 같은 인물에 대한 이야기더라도 내용이 색다르게 쓰이는 것 같아 읽고 보니 읽기 전에 한 고민이 무색해졌다. 개인적으로 고명섭의 『하이데거 극장』이 여러모로 더 좋다고 느끼지만, 이 책 역시 훌륭한 평전임은 분명한 듯하다.

처음에는 아리송했던 하이데거의 철학이 이제는 꽤 뚜렷해진다. 그의 사유엔 발끝도 따라갈 수 없음을 순순히 인정하는 바이지만, 물음을 멈출 수 없었던 그의 존재론적 충실함은 꽤 와닿았다. 명쾌하게 정의할 수 없음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향해 치밀하고 끈질기게 전개하는 사유는 처절해 보일 정도다. 하이데거 스스로도 존재의 의미를 묻는 질문 자체에 답을 내릴 수 없다고 하니, 그의 존재론을 탐독하는 독자들이 따라가기 쉬울 리 없다.

존재자를 시간성과 결부해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는 그의 시도는 결국 존재자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게 되는 역설이 일어나 좌절할 수밖에 없는 시도였다. 존재는 존재자에 의해 포섭되는 개념이 아니기에 시도 자체가 그가 주장한 개념들과 모순을 일으키고 만다. 이 책에는 기술되지 않지만, 『하이데거 극장』에는 이 모순을 극복할 『시간과 존재』라는 후속작을 준비하려 했다는 언급이 나온다.

또한, 하이데거의 흠이라고 할 수 있는 2차 세계 대전 중의 나치 부역 관련 내용은 『하이데거 극장』보다 이 책이 더 상세하게 설명해 준다. 해석이야 당연히 분분한 것이지만, 각 철학자 등이 바라보는 관점 등이 명쾌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가 히틀러를 좋아하고, 국가사회주의당의 당원이며, 이후 정화위원회에 의해 나치 세력 여부의 검증을 요구당할 만큼의 행적이 있다. 여러 부분에서 하이데거는 충분히 나치 가담자로써 비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반유대주의에 반대했고, 인종주의와 학살 등에 명백히 반대했다고 한다. 나는 하이데거의 나치 관련한 사안들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생각한 철학을 구현하기 위해 나치즘을 이용하려 했다는 생각이다. 나치즘의 민족성 고취와 같은 점들이 하이데거의 존재론 속 '민족성'에 맞닿아 그는 자신의 철학을 몸소 실현할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 게 아닐까 싶다. 또한, 대학 개혁을 주장했던 그이기에 나치즘의 일부분이 그 대학 개혁에 좋은 사상으로 쓰일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동조자는 아닐지언정 방관자로써 그는 비판받아야만 한다고 본다.

하이데거의 철학을 접할수록 철학은 고통이라는 것을 느낀다. 철학을 통해 사유가 넓고 깊어지는 것은 그것대로 행복하고 좋지만, 막상 그 철학을 읽고 이해하는 과정은 너무나 힘들다. 어떻게 생각하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고뇌인 것처럼 볼 수도 있으나, 난 그렇게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인가 보다. 범접할 수 없는 사유 앞에 좌절하며 그것을 배워나가는 게 내 앞으로의 독서 인생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힘들고 고통스러울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 길을 걷고 싶고, 걸어가야만 한다.

나는 나를 끝없이 물음 속에 던지는 존재자이고 싶다. 늘 낯선 것만 추구해서 그 낯선 것에 익숙해지는 절망적이고 위태로운 순간이 올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내가 선택한 운명이고 숙명일 것이다. 적어도 정신만큼은 익숙한 것에 안주해서 안정적일 바엔 낯선 것에 익숙해져 절망하는 것을 선택하겠다.

높은 흔들 다리라는 내 생 위에서 아래는 무시한 채로 앞만 보고 빠르게 가는 삶을 살 바엔, 아래 깊게 보이는 심연을 마주하며 위태롭게 한 걸음씩 전진하는 삶을 선택하겠다. 그 심연의 마주함 중 한 행위가 내게는 바로 철학으로의 투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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