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열음 Jun 03. 2023

왜 글을 쓰나요?

원초적이고 당연한 질문이 돌아왔다

나. 왜 글을 쓰고 있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소설을 쓰고 있다. 나에게 글을 쓸 수 있는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어서 그 에너지들을 최근에는 소설 쓰기에만 쓰고 있다. 쓰고 싶은 글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에너지가 빼앗길까 두려워 브런치에는 기웃거리는 게 다였다. 그런데도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종착지는 아이러니하게도 브런치다. 




글을 쓸 수가 없다. 쓰는 것에 어려움을 느껴본 적 없는 나로서는 당황스럽다. 쓰기 싫은 적은 있어도 쓰는 게 두려웠던 적은 별로 없었는데. 시놉시스는 몇 번이나 피드백을 받아도 정돈되지 않고 남들의 눈에 명확하게 띄는 문제점은 어째서인지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빙빙 헤매고 있다. 당장 나에게 남은 건 두 번의 합평뿐인데, 그 안에 뭐든 써가지 않으면 안 되는데.



초조해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래야만 했다. 나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이렇게 젊은데 무슨 말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나한테는 시간이 없다. 내 나이 같은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내가 글을 쓰는 걸 반기는 사람이 없다. 내 꿈을 아무도 응원해주지 않기 때문에 나는 양심 없게도, 들인 시간 대비 좋은 결과물을 내는 게 중요했다. 실패가 용납되지 않았다. 내 글이 쓰레기인 걸 알면서도 써나갈 용기가 없는 것이다. 당연히 난 작가도 아니고 글을 오래 쓴 사람도 아니고 조예가 깊은 것도 아니니 좋지 않은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그걸 그럴 수 있다고 받아들일 시간이 부족하다.



2학기에 나는 막학기고, 전공을 5과목 들을 거고, 그 후에는 두 달 동안 토익과 오픽 공부를 해서 스펙을 만들어야 하고, 그러고 나면 취준생이다. 그러니까 소설을 머릿속에서 굴리고 막대한 시간을 들여서 글을 쓸 수 있는 건 자리 잡기 전까지는 지금밖에 없다. 지금을 놓치면 최소 2년 후다. 취직하는데 1년을 잡고, 그리고 적응하는데 1년을 잡으면 그렇다. 나는 하루빨리 인정받고 싶고 뭐든 되고 싶었다. 내가 시간을 들이는 것들은 결과가 눈에 보이는 게 아니어서, 타이틀 하나가 없으면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는 것들뿐이라서 언제나 괴롭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게 실감이 나니까. 그러니까, 내가 몇 달 내내 스트레스받아가면서 간신히 쥐어짜 낸 소설 하나가, 나에게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못하면 나는 그저 시간만 낭비한 인간이 되고 만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주변이 그렇다. 그래서 나에게는 명분이 필요하다. 내가 글을 좋아해도 되는, 글을 써도 되는, 너라면 그럴 수 있지, 이 말 하나를 듣기 위한 명분. 



나는 글을 계속 쓰고 싶으니까.





극도로 글이 막히게 되면서 안 좋은 예감만이 들었다. 일단 쓰라는 건 무책임한 말이다. 나는 그런 식으로 너무 많은 글들을 버렸고, 그것 또한 내 성장에 밑거름이 되는 걸 알면서 이제는 그 조금의 에너지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질 좋은 하나가 필요했다. 지금 시놉시스를 고민하고 또 고민하면서 결국 하나의 질문에 도달했다.





나, 글을 왜 쓰고 있지?




시선을 바꾸자 다른 질문도 돌아왔다.




청소년 때 네가 듣고 싶었던 말이 뭐야?

왜 청소년소설이 쓰고 싶은데?



내가 쓰는 건 청소년소설이었다. 내 목표는, 청소년들이 소설 하면 떠올릴 수 있는 책이 되는 것. 청소년추천도서로 불려서 학교 도서관에 내 책이 하나씩 들어가는 것. 책을 좋아하는 청소년들이 내 책을 한 번은 마주해 보는 것. 그래서, 이야기를 좋아하게 되면 정말 기쁠 거고 읽는 동안 재밌다고 느끼기만 해도 충분하다. 




나는 청소년 때 굉장히 불만이 많은 편이었다. 화도 많았고 솔직했고 감정을 숨길 줄도 모르는 오만함도 있었다. 내가 주로 했던 생각은, 이 생활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것. 대학생이라는 건, 스물이라는 건 나에게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은 미지의 세상이었다. 똑같이 시간이 흐르면 된다는데 어쩐지 나에게는 미래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매일 같은 생활이 반복될 것 같았다. 


나는 어른들이 싫었다. 애처럼 굴지 말라고 하면서도 맞먹으려고 한다고 말한다. 어른스럽지 못하고 애들한테 휘둘리는 것도, 자기들의 기분과 사정에 따라 우리를 휘두르려는 게 싫었다. 초면에 반말하는 사람들도 싫었다.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내 생각과 관념을 무시당했다. 나도 생각이라는 게 있는데 마치 내 선택은 틀린 것처럼 말하는 게 싫었다. 나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원래 그렇다는 식으로 묶어버리는 게 싫었다. 뭘 모른다는 그 태도가, 끔찍했다.


학교가 답답했다. 나에게는 미래는 오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어색하고 생경하고. 내가 겪는 것들이 얼마 있으면 아무렇지 않게 될 거라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학교가 전부였고, 학교가 다였다. 학교 밖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학교 안과, 학교 안이 아니었을 뿐. 정신적인 공간은 줄곧 학교에 있었다. 학교 이상으로 무언가를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은, 앞으로 이것보다 더 행복해질 거라는 거. 네 세상은 학교가 다가 아니라고. 더 많은 걸 알고 보게 될 거라는 거. 너의 삶과 행복을 학교생활만으로 단정 짓지 말라고. 


그리고, 너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나는 학교에 다니면서 나를 싫어하는 법을 더 많이 배웠다. 단체생활에서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곧잘 낙오자 딱지가 붙었으니까. 학교 안에서 배운 것들이 전부가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전부처럼 느껴졌다. 칸칸이 짜인 시간표처럼 내 능력치가 툭툭 잘려서 수치화되는 기분이었다. 틀을 벗어난 나는 내 생각보다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노력할 수 있었고 달라질 수 있었다. 학교에서 마주한 내가 나의 전부가 아니었다.



그걸 알기까지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세상에 원래 그런 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인이 되고 나서 나는 나를 좋아할 수 있게 됐다. 더 많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됐다. 고등학생 때는, 재수 때는, 하루종일 나랑 있어도 전혀 알 수 없었던 것들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무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나라는 사람이 어떤 인간인지. 그리고 내가 어떤 인간인지까지. 








내가 글을 쓰는 목적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였다. 내가 보고 싶은 걸 써줄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왜 하필 청소년소설이냐는 질문에도, 그저 내가 겪은 게 많아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정말 많은 문제들이 있었고 끊어진 인연들이 많았으니까. 성인소설을 쓰기에 내가 아는 게 없으니 그게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내가 청소년 때 한 생각들의 답들을, 이제는 어른이 된 내가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고 싶어서였다. 이게 답이 아닐 수도 있지만 너희한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좀 더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아마 그랬으면 나도 조금 더 행복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을 것만 같아서.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야지. 난 고통스러우려고 글을 쓰는 게 아닌데. 내가 즐거워서, 내가 느낀 것들을 전하고 싶어서 시작했을 뿐인데. 아직 글을 쓴 지 2년밖에 안 됐다. 그것밖에 안 됐는데 양심이 없었다. 결과물보다도, 내가 쓸 때 즐거우면 그걸로 된 게 아닌가. 



나를 위해 글을 쓴다는 걸 잊지 않기로 했다. 성과 말고 즐거움을 생각하자. 즐거운 거 다음에 성과. 즐겁지 않으면 하지 말자. 난, 즐겁게 살고 싶으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부끄러운 고백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