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암 치료의 시작
2021년 1월의 중순.
드디어 1차 항암을 투약받기 위해 나는 서울의 병원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꽤 추운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항암 약을 맞을 두려움에 추위를 느낄 정신도 없었다. 코로나는 점점 더 극심해져서 사람들은 중요한 일 아니면 아예 비행기를 타지 않았고, 아직 코로나 백신이 개발되기 전이라 전 세계가 코로나 사망자들의 증가 소식과 더불어 각국의 비행 길을 걸어 잠그고, 사람들의 이동을 제한했다.
기저질환 환자들이 코로나에 걸릴 경우 치명률이 매우 높았으므로 나 역시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나를 포함한 모든 대한민국 사람들이 함께 마스크를 착용해 주어서 오히려 감염의 불안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었고, 온 세계가 코로나로 멈추어 있는 시점에 나는 항암 치료를 받게 되어 어쩌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치열하게 살았으니 모든 인간들 전부 쉬고, 나도 내 몸 돌보지 않고 앞만 보고 살아왔으니 한 템포 쉬어가라고 마치 우주가 명령하는 것 같았다. 나만 혼자서 항암 치료를 받느라 외롭고 서러운 것이 아니라, 왠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위해 함께 고통을 감내해 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항암이라는 고통의 시작점에서 이 우주가 마치 나에게
“괜찮아. 너만 힘든 게 아니야.”
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기왕 항암치료받는 김에 1년은 오롯이 치료에만 몰두하며 나를 위한 시간으로 보내기로 마음을 먹고, 어차피 코로나로 집단 강의를 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일에 대한 걱정은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아이가 충분히 성장할 때까지만 하려던 일이었는데, 코로나의 발생으로 자연스럽게 오프라인 강의는 사라질 업이 되어 버려서 고민할 여지없이 일에 대한 걱정은 내려놓아 버렸다. 치료가 1년 이상 소요될 수도 있겠지만, 그다음 일은 미리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1년 동안 생명이 붙어 있게 될지 저 세상으로 가게 될지 알 길이 없었으니, 일단 1년은 현대의학에 몸을 맡기고 최대한 생존에 집중하는 것이 그 이후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걱정하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사 그 간 뭘 그리 먼 곳까지 바라보면서 늘 걱정을 달고 살았는지 그제야 왜 모든 성인들과 종교는 “걱정하지 말 지어다”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항암 약을 투여받기 전, 가슴에 있는 종양의 크기를 재확인하고 수술 시 종양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초음파 검사를 받으며 종양의 위치에 핀을 삽입하는 시술을 받았다.
나는 진단받은 그날 이후부터 나름 관리를 한다고 술과 고기를 끊었고, 매일 저녁식사 후엔 한겨울 칼바람도 불사하고 한 시간씩 걷기 운동을 시작했다.
자연치유 센터에 가서 종양의 크기를 어떻게든 줄여보겠다고 미용관리용 고주파 기계로 상체 마사지도 받았다. 그런데 종양 크기가 작아지기는커녕 처음 진단받았을 때보다 0.02CM 더 커져있었다.
처음 진단 시에는 2.6CM였던 종양의 가로 사이즈가 2.8CM로 커져 있었던 것이다. 처음 진단을 받은 시기부터 항암을 시작하기까지 약 한 달이라는 그 짧은 기간 동안 내 몸의 암세포는 이미 성장의 폭을 넓혀가고 있었다.
만약 내가 항암치료를 포기하고 자연치료만 고집했다면 암세포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내 몸을 장악했을까를 상상하니 등골에서 식은땀이 났다.
“종양의 크기가 더 커졌네요 선생님?...”
작은 수치에도 민감할 수밖에 없는 암환자의 처지가 되고 보니 안 그래도 예민한 성격에 날이 섰다.
“이 정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일단 가셔서 항암 치료 잘 받으시고 첫 번째 항암 약 네 차례 투약받으시고 경과 확인하러 오시면 됩니다.”
주치의는 암환자들의 예민한 반응에 익숙한 베테랑이었다. 작은 수치의 변화에도 예민하게 걱정하는 나에게 항상 덤덤하게 별 일 아니라는 듯 얘기해 주었다. 그런 주치의의 태도가 심리적으로는 큰 위안이 되었다. 만약 의사가 겁을 주면서 같이 걱정했더라면 나는 상담실을 나온 그 순간부터 걱정에 시달릴 것이 분명했다.
내가 받게 될 항암 치료는 아드리아마이신(A)과 사이클로포스파마이드(C)를 섞어서 3주에 한 번씩 전반전에 4차례 맞고 도세탁셀(D)이라는 탁솔계의 약을 후반 전에 역시 3주 간격으로 4회 투약, 8회를 선 항암으로 맞는 과정이었다.
3주에 한 번씩 8번을 투약하는 일정이니 이변이 없는 한, 선 항암의 기간은 총 24주, 월로 계산하면 6개월이 소요된다는 계산이 나왔다. 선 항암 치료만 기본 6개월이 필요하다니 그럼 수술은 7월에나 가능했다.
선 항암 없이 수술을 받았더라면 치료 기간을 6개월이나 단축시킬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하니 아쉬움이 남았지만 선 항암으로 이미 온몸에 상주하고 있을 암세포를 사멸시킬 수만 있다면 6개월쯤이야 긴 시간도 아니니 천천히 가자고 스스로를 달랬다.
종양외과 의사는 지난번 설명했던 항암제의 부작용에 대해서 한 번 더 설명해 주었고, 제주도에 돌아간 후에 만약 긴급한 상황이 생기면 응급실에 갈 수 있도록 진료 의뢰서를 한 장 작성해 주었다.
부작용이야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에서 하도 많이 봐서 구토가 나오고 머리카락이 빠지는 그림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지만 구내염이 올 수도 있고, 고열이 날 수도 있다고 했다.
처음 진단을 받고는 제발 항암치료만은 받지 않게 되기를 기도했다. 민머리가 되어 쓰레기 통을 부여잡고 웩웩대는 상상은 내 인생의 지도에 한 번도 그려본 적 없는 그림이었다.
처음에 선 수술 치료를 하겠다고 주치의의 말을 들었을 때 역시 나는 운이 좋다며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선 항암 후 수술로 치료 방법이 바뀌었고 항암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 온 이상 한 보도 물러날 수가 없었다.
주사실 앞에서 번호표를 받고 내 차례를 기다리면서 수많은 암 환자들을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 웬 항암 치료받는 환자가 이리도 많은지, 번호표 발급 후 한 시간 이후에나 내 차례가 온다고 했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암에 걸리는구나…’
‘나만 아픈 게 아니구나…’
‘저 사람들은 어떤 암에 걸렸을까?’
‘젊은 친구가 어쩌다가…’
대기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수 만 가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오늘이 첫 번째 항암 약을 맞는 날이니 내가 그중엔 가장 환자 같지 않은 환자였다. 겉으로 보기엔 완전 건강해 보이는 데에다 항암 약 맞으러 온 환자 치고는 매우 씩씩했기 때문이다.
대기 시간이 길어지자 두려움이라는 녀석이 뇌리에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여러 차례, 불안으로 잠식된 정신은 혼미해졌다. 자리에 앉아서 걱정으로 시간을 때우는 게 신상에 좋을 게 없는 듯해서 내 차례가 다가오면 문자를 보내달라고 카운터에 부탁했더니 가능하다고 했다.
나는 넓디넓은 병원을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아, 지금이 내가 항암 치료를 피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데, 그냥 주사 맞지 말고 도망갈까?’
하는 생각이 두어 차례 마음을 흔들었다.
큰 일 앞에서 대범한 편인 나도 이렇게 겁이 나는데 실제로 도망가는 환자들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엄마와 딸아이를 생각하니 투약받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면 가족들이 걱정을 할 것 같았다. 나와 함께 항암치료에 참전하기로 한 전우들이었다. 전장에 나가보지도 않고 후퇴라니 전우들 볼 낯이 없을 것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자연스레 병원 안 매점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빵집도 있었고, 식당의 메뉴들도 다양했다. 평소 같았으면 벌써 빵집에서 집게를 들고, 기름지고 달콤한 빵 위주로 쟁반에 담고 있었을 텐데 참새도 방앗간을 지나쳐야 할 때가 있었다.
코로나로 무언가 사 먹는 것까지 불편해져서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40년 간 나는 별로 배고파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간식거리를 입에 달고 살았다. 빵이며 쿠키며 눈에 보이면 무조건 사거나 챙기는 게 습관이었다. 내 핸드백 속에는 항상 초콜릿이나 사탕이 들어있었고, 그런 것들이 모두 내 몸속으로 들어가 암세포가 성장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나는 매우 풍요로웠고, 풍요가 넘쳐나니 병이 되었다. 결코 마음이 풍요로웠던 건 아니다. 역으로 나는 늘 허기져 있었고, 그래서 그렇게 달콤함에 집착했는지 모르겠다.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나는 달콤함과 기름진 것에 중독되어 있었고, 암이라는 병이 찾아오고 나서야 내가 내 몸 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암이라는 병은 참 기이한 병이다.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매우 위협적인 것이기도 하면서, 우리가 살면서 한 번도 해 보지 못 한 생각들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면에서 고마운 것이기도 했다.
나는 살면서 한 번도 내 식습관에 대해 뒤돌아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암 진단을 받은 후, 지속적으로 스스로 암에 걸린 원인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니 너무나 명확하게도 답이 나왔다.
나의 나쁜 습관들. 나의 식습관, 생활습관, 생각습관 모두가 암에 걸리고도 남을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그런 나쁜 습관들로 40년을 넘게 살아왔는데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었다.
내 몸에게 미안함과 동시에 아직 살아 있어 줘서 고마운 생각이 들어서 매점에 보이는 빵들을 뒤로하고 주사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때마침 주사실에서 내 차례가 다 되어간다는 문자가 들어왔다.
병원에서 주어진 환자 번호와 생년월일을 확인한 간호사는 재빠르게 팔뚝에 있는 혈관을 찾아 바늘을 꽂으며 말했다.
“부작용 억제 주사 먼저 들어갑니다.”
순식간에 투명한 약이 몸에 들어가자마자 간호사는 빨간색 약제가 들어있는 권총만 한 주사기를 내 혈관에 연결했다.
“이 약은 혈관 밖으로 새면 피부조직이 상할 수 있는 위험한 약이니 아프면 얘기하셔야 돼요.”
“어휴, 무서워라…”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침대에서 누워서 맞는 주사도 아니었고, 마치 대수롭지 않은 백신 한 방 맞는 것처럼 의자에 앉아서 간호사를 마주한 채로 항암 주사를 맞았다.
“그래도 씩씩하게 잘 맞으시는데요?”
“씩씩해요? 저 여기 오기 전에 도망가려고 몇 번을 생각하다가 왔는데요?... 실제로 도망가는 환자들도 있을 것 같아요, 그죠?”
주사약이 들어가는 것에 집중하느니 간호사랑 수다나 떠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아서 너스레를 떨었다.
“그럼요. 도망가시는 분들 계세요. 오늘도 남편이랑 같이 오신 한 분 도망가셨어요.”
빵 하고 웃음이 터졌다. 사람 마음이 다 똑같은 법.
‘항암 주사가 무섭지 않은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도망가고 싶던 발길을 돌려 주사실로 온 나는 예측대로 도망가는 환자도 분명 있을 거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웃고 떠드는 사이 나에게 주어진 항암 약의 용량이 전부 투여되었다. 키와 몸무게에 따라 용량이 정해지는 듯했다. 간호사는 60kg라고 적힌 내 몸무게를 들여다보며,
“투약받으시는 동안 살이 빠지거나 찌지 않도록 유의하세요. 항암 약 용량이 바뀌면 효과가 좋지 않을 수 있어요.”
종일 암환자들에게 주사 바늘을 꽂느라 지칠 법도 한 간호사는 태연하고 재빠르게 주사기의 약을 밀어 넣었고, 그런 그녀의 전문적인 태도에서 나는
‘힘내세요. 잘 될 겁니다.’
라는 응원의 메시지를 얻었다.
주사를 전부 맞는데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이렇게 간단한데 뭘 그렇게 겁을 냈을까?’
물론 항암 약의 부작용은 아직 나타나기 전이었지만 첫 항암 주사의 투여 과정은 생각보다 빠르고 간단하게 지나갔다. 예전에는 항암 주사를 맞으면 부작용으로 인한 응급상황 때문에 병원에 입원을 시켰지만 요즘은 부작용 억제 약들이 잘 나와서 입원은커녕 암 환자들을 그저 백신 주사 한 방 맞으러 온 일반인들처럼 대하는데 나는 그 점도 맘에 들었다.
나를 곧 죽을 사람처럼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동정하는 태도로 대했다면
‘이제 나는 정말 죽는구나.’
라고 생각 했을지도 모른다.
암 환자들이 하도 많아서 병원 관계자들이 우리를 대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구나 싶으면서도 그런 덤덤함이 주는 위로가 있었다.
“별 일 아니야. 항암 주사 맞고 암세포 날려버리면 되지.”
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투약 후 집에서 지내면 부작용도 조금만 앓고 지나갈 수 있을 것을 병원에서 환자들과 같이 누워있으면 그야말로 중증환자가 되어버린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병원에서 주는 구토제를 받아 들고 공항으로 가려는데 하늘에서 내리는 눈발이 심상치 않았다.
‘아,,, 하늘도 나의 암 발병 소식에 슬퍼하는구나.’
‘비행기가 안 뜰 수도 있겠는걸?’
수년간 항공사의 승무원으로 지냈던 나의 촉에 의하자면 비행기가 결항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마치 하늘에 구멍이 난 것처럼 작고 커다란 눈송이들이 마구 쏟아져 내렸다. 몇 발자국 걷는데 한 치 앞을 내다볼 수가 없었다.
‘에이 첫 항암 약 투여일인데, 뭐 급할 일 있나?... 지금까지 급하게 살아오느라 병에 걸렸으니 지금부터는 천천히 살자. 뭐든 천천히….’
결항될 것 같은 비행기 일정은 접어두고, 공항 근처의 호텔을 검색해서 일단 예약을 했다. 평소 같았으면 굉장히 비쌌을 5성급 호텔 가격이 코로나의 여파로 3분의 1 정도로 내려있었다. 이게 웬 떡이냐 싶어 얼른 방을 잡은 후 내일 아침에 탑승 가능한 비행기 좌석을 찾아보았다.
이코노미 클래스엔 좌석이 없기도 했거니와 혹시 내일부터 시작될지 모를 항암의 부작용에 대비해 딱 한자리 남아있는 비즈니스 석을 간신히 예약했다. 결항으로 인해 내일 오전 제주행 비행기 좌석은 이미 만석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소소한 행운은 늘 있었는데, 암도 같이 찾아온 것을 보면 그야말로 인생엔 '행운 총량의 법칙’이라는 것도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보니 암이 찾아온 것도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전 타지 않던 단거리 비행기의 비즈니스 클래스를 다 타보고 말이다.
우선 걱정하고 계실 엄마께 전화를 드렸다. 항암 약은 잘 투여를 받았고,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결항될 것 같아 호텔을 예약했다고 전하니 어머니는 그제야 안심하는 듯했다.
“괜찮니?”
“응 엄마, 아직까지 아무 반응은 없네?”
“윤하는 아침에 학교에 잘 갔다. 저녁 먹이고 내일 아침에도 챙겨서 학교에 보낼 테니 걱정하지 말고 호텔서 푹 쉬다와.”
내가 투병하는 동안 어머니는 아이를 챙겨주시기로 했다. 물론 나의 병간호도 함께 해 주시면서 말이다. 아직 어머니가 젊고 활기차다는 게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다. 든든한 버팀목이 곁에 있다고 생각하니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호텔엔 투숙객이 거의 없어서 나를 큰 스튜디오 룸으로 업그레이드까지 시켜주었다. 그러고 보니 비행하던 시절에도 나는 호텔 업그레이드 라던지, 객석 업그레이드 같은 특혜를 자주 받았다.
우주의 기운은 늘 나를 향해 응원해 주었고, 눈이 서울 하늘 전체를 뒤덮은 나의 첫 항암 투여 일에도, 나는 우주로부터 수많은 특혜를 받았다.
항암 약 잘 맞고 오라는 주치의부터 시작해, 덤덤하게 부작용에 대해 설명해 주었던 종양 내과 의사, 백신 한 방 놓듯 무덤덤하게 항암 약을 투여해 주었던 간호사, 하늘에서 내려 준 함박눈, 호텔 객실을 업그레이드해 준 호텔리어, 나를 위해 비워두었던 한 자리 비행기의 비즈니스 석까지 무엇 하나 당연한 것은 없었다.
감사해야 할 일들이 내 앞에 펼쳐지고 있었고, 이대로라면 나의 항암 치료는 시작부터 순탄한 여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