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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끌치유 Oct 08. 2023

첫 항암 후

고통을 감내해 내는 비법

항공사 승무원 경력만 7년이었던 내가 비즈니스 클래스를 풀 페이 하면서 제주까지 그냥 내려가기엔 조금 아쉬웠다. 


평소엔 제주-서울의 한 시간 거리를 비즈니스를 타고 다닐 정도로 사치스러운 편도 아니고 코로나로 인해 음료 한 잔도 못 받고 비즈니스 풀페이를 내야 한다니 본전생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라운지에 들러서 휠체어 서비스를 신청했다. 내가 걷지 못하는 환자도 아닌데 휠체어는 오버인가 싶다가도 지금 아니면 언제 휠체어 한 번 타보겠나 싶어서 요청을 했다.


항공사 측에 내가 항암 약물 치료를 받았는데, 부작용이 걱정돼서 휠체어 서비스를 받고 싶다고 하니 흔쾌히 준비해 주겠다고 했다. 어제는 약물 투여 첫날이라 큰 부작용은 느낄 수 없었지만 오늘부터는 부작용이 어떻게 몸 밖으로 표출될지 모를 일이었다. 혹시나 심혈관 부작용으로 쓰러질 수도 있었다.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으니 휠체어를 타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제주까지 안전하게 도착하면 극도의 불안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의 삶이 고되다 보니 늘 상황의 최선과 최악의 양면에 대비하는 습관이 생겼다. 항암 약 투약은 내 삶의 첫 경험이었고 이 와중에 최선이랄 것은 항암 치료를 받는 동안 큰 부작용 없이 잘 견뎌 내고 완치가 되는 상황이었으며, 최악이랄 것은 몸이 항암 약물에 버티지 못해 응급실로 실려가거나 죽는 경우가 내가 예측할 수 있는 두 가지 경우의 수였다. 


극과 극을 달리는 결과지만 어차피 삶이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사망이 꼭 최악의 경우라고 볼 수만도 없었다. 


그렇다고 죽는다는 생각은 구체적으로 해 보지는 않았다. 항암 치료받다가 전부 죽는다면 세상에 항암 치료를 받을 사람이 몇 이나 되겠는가?


 ‘죽을 때 죽더라도 오늘을 살자’


라는 생각으로 오늘 내가 나에게 베풀 수 있는 최선의 서비스를 매일매일 제공하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에게 베풀 수 있는 소소한 것들이 정말로 많았는데, 휠체어 서비스도 그중에 하나였다. 


어제 내린 눈으로 활주로가 얼었을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비행기는 제주 공항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휠체어를 타니 우선 탑승권이 주어져서 비행기도 가장 먼저 타고, 내릴 때에는 직원의 도움을 받아 공항 주차장까지 편안하게 올 수 있었다. 


부작용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긴장하여 몸에 힘이 없었던 것을 제외하면 사실 아픈 곳도 없었다. 성심성의껏 휠체어를 밀어준 젊은 친구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보호자가 곁에서 안전하게 지켜준다는 느낌은 참 따뜻하고 감사했다. 


제주 공항에서 집까지 15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라 무리 없이 집까지 운전해서 도착했다. 하루 만에 돌아오는 집인데 이렇게 안락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 만약 어머니가 안 계셨다면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싶을 정도로 어머니의 존재감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사전의 전략대로 내가 항암을 견뎌내는 동안 어머니는 아이의 등하교와 나의 식단을 책임져 주시기로 했다. 


어머니는 딸을 살리겠다는 일념 하에 유방암에 걸린 친구들로부터 항암 할 때 먹으면 좋은 음식들에 대한 정보를 얻어 오셨고, 유튜브를 통해 이미 유방암 전문가가 되어 계셨다. 어머니도 이 년 전에 방광암 진단을 받고 재발 후 관리 중이셨는데, 다행히 초기에 발견이 되어 항암 치료는 받지 않으셨다. 그래서 암에 대한 공부는 많이 해 두신 터였다.


“좀 어떠니?” 

“아직 별 이상 없어. 속이 약간 차 멀미 하는 것처럼 불편한데 엄마, 요즘은 약이 좋아져서 부작용이 예전처럼 심하지 않데요.”

“그렇지? 내 친구들도 유방암 걸리고 항암 치료받았는데, 구토하고 식욕이 떨어져 먹지를 못 해서 그렇지 다 들 견딜 만하다고 했어. 너는 젊어서 괜찮을 거야.”


세상에 어떤 큰일이 닥쳐도 어머니는 강했다. 딸이 유방암에 걸려서 속상하고 놀라셨을 텐데 한치도 흔들림이 없으셨다. 눈물을 보이시거나 약한 모습은 내 앞에서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강인한 분이시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주고 아침 식사도 잘 차려 드셨다고 했다. 


“배고프니? 뭐 좀 먹을래?”


어머니는 내가 항암 치료를 받으러 서울로 다녀온 사이, 치료 중 내가 먹을 수 있도록 동치미를 담가 놓으시고, 야채 반찬들을 무쳐 놓으시고, 생선을 사다 놓으셨다. 집안에 퍼져있는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를 맡으니 갑자기 울렁거림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식욕이 올라왔다.


“응, 엄마.”


오랜만에 엄마랑 같이 집에 있으니 너무 좋았다. 늘 바쁜 엄마를 그리워하던 유년시절, 내가 외국에 살아서 엄마와 함께 지내지 못했던 2,30대에도 나에게 엄마는 늘 그리운 존재였는데 이렇게 나이가 들고 함께 지낼 수 있게 되다니 외로웠던 어린 시절에 대한 보상을 받는 듯했다. 


엄마랑 같이 알콩달콩 이야기도 하면서 저녁 시간을 보내는 게 어릴 적 꿈이었는데, 30년이 지난 지금 그 꿈이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니 병을 얻어서 그렇게 된 게 아니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엄마가 곁에 있으니 한 없이 좋았다. 누군가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된장찌개와 생선 구이를 반찬으로 밥 한 공기를 뚝딱 해 치워 버렸다. 


‘나 항암 약 맞고 온 사람 맞아?’ 


할 정도로 엄마의 집 밥은 맛있었다. 평생 요식업에 종사하신 어머니는 웬만한 호텔 요리사보다 음식 솜씨가 좋으셨다. 지금부터 엄마가 해 주는 밥을 항암 치료 하는 내내 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니 힘이 불끈 솟았다.


엄마와 이러쿵저러쿵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얘기하며 밥을 먹으니 소화도 금방 되었다. 엄마는 세상에서 내 얘기를 제일 재미있게 들어주는 분이다. 엄마 앞에서는 좋은 얘기, 나쁜 얘기 가릴 것이 없었다. 내가 뭐라고 해도 늘 내 편이 되어 주는 분이시니 말이다.


생각해 보니 지금껏 사느라 바빠서 삶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누군가와 함께 나누며 살 지를 않았다. 일단 말하기 시작하면 분노와 원망의 하소연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누구에게도 내가 살아오는 동안 이런 일들이 있었다고 얘길 할 수도 없었다. 


동기부여, 소통 강사로 살면서 사람들에게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고 긍정적인 말만 하라는 것이 늘 내 강의의 빠지지 않는 주제였다. 그런 내가 지치고 힘들다고 누구한테 얘기할 수 있었겠는가? 


늘 씩씩한 척, 강한 척, 즐거운 척, 괜찮은 척하며 괜찮지 않은 시간을 오래도록 견디며 지내왔다. 지금 생각하면 무너지고 넘어져도 됐을 인생의 고비들을 지나오면서 아무렇지 않은 듯 꿋꿋하게 버텨냈던 것들이 몸 안에서는 곪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힘주고 버텨왔으니 이제부턴 힘을 빼고 아프면 아프다, 힘들면 힘들다라고 인정하고, 싫은 건 싫다고 거절할 줄 알게 되면 몸도 자연스레 치유가 될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제부턴 항암의 부작용으로 몸이 힘들어질 테니 그에 저항하지 않고, 다가오는 인생의 쓰나미에 처연히 몸을 맡기는 것. 그것이 지금의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는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항암 부작용에 대한 두려움은 눈 녹듯 사라졌고, 나는 항암 약의 효과를 최대화시키기 위해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놓지 않았던 긴장의 끈을 놓아버리고, 긴긴 휴식의 시간으로 들어갔다. 그 간 바쁘다는 핑계로 보지 않았던 한국 드라마도 실컷 보면서 말이다. 


어쩜 암의 발병은 하늘이 주신 기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간 열심히 사느라 해 보지 못했던 것들 실컷 하고, 내 몸에게 휴가를 좀 주라고 우주가 신호를 보낸 것이라 믿었다. 


이미 암 진단을 받은 일은 돌이킬 수도 없는 사실인데 지난날을 후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자기 연민에 빠져 울고 불고 난리를 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었다. 


슬기롭게 지금의 어려움을 잘 헤쳐나가는 게 가장 나다운 선택이었다. 

처음엔 췌장암인 줄 알고 죽음까지 준비했었던 것에 비하면 항암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감사했다. 


엄마가 차려 주신 밥을 먹고 나니 긴장이 풀리면서 잠이 쏟아졌다. 이제까지 잠도 자고 싶은 만큼 실컷 자 본 적이 없었다. 항암 치료받는 동안엔 그 간 부족했던 잠을 지겹도록 자는 것도 계획에 포함시켰다.


엄마의 간병을 받으면서 먹고 싶은 거 실컷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하기 싫은 일은 안 해도 되고, 보기 싫은 사람 안 만나도 된다니… 항암치료가 전부 나쁜 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지만 그 속에서 발견되는 작은 행운들 덕분에 살아지는 것이다. 나의 인생도 뒤 돌아보면 예측하지 못했던 기구한 사건들의 연속이었지만 그 속에서 찾아지는 소소한 행운들 때문에 고통 속에서도 내 인생은 늘 풍요로웠다. 


유방암 진단 받은 것을 인생의 한 점으로 바라보면 고통의 순간이지만, 그로 인해 내가 지금까지 누려보지 못 한 ‘쉼’과 ‘되돌아봄’을 만끽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는 내 인생에 두 번 다신 없을 엄청난 행운이다. 


항암약은 이미 몸속에 퍼지고 있었고, 어머니가 해 준 집 밥도 든든하게 먹었겠다, 이제 몸이 이 독한 항암약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지를 관찰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다행히 나는 약발이 아주 잘 드는 체질이라서 어떤 약이던 먹으면 바로 몸에서 반응이 오는 편이다. 항암 약이 잘 들어서 암세포를 관해 시켜주리라 굳게 믿으며 쏟아지는 낮잠의 블랙홀 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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