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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윤원 Nov 19. 2020

높은 사람도 결국 더 높은 사람을 무서워하는 거였구나

퇴사한 간호사의 취준일기. 그대는 단 한 순간도 빛나지 않던 적이 없다.

열 세 번째, 높은 사람도 결국 더 높은 사람을 무서워하는 거였구나.



내가 다니던 병원의 승진 구조는 이랬다. 간호사들이 모여있는 병동 부서. 그 병동 부서의 부서장. 그리고 그 부서들이 모인 팀의 팀장. 팀장님은 적어도 30년 이상 이 병원에서 일하신 분들이었다. 팀장님은 간호에 직접 참여하시지는 않지만, 가끔씩 병동을 순회하시거나 신규간호사와 면담을 진행하시기도 했다.


그 날은 내가 팀장님과 면담을 진행하는 날이었다.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데 부서장님이 호출하셨다.

"00아, 너 팀장님에게 어떤 말을 할거니?"

"네...?" 무엇을 물어보실지도 모르는데 무슨 말을 할지 어떻게 미리 생각해 놓았겠는가.

"난 네가 우리 부서에 대해 최대한 좋게 말해줬으면 좋겠다."

"아아... 네 알겠습니다."

"혹시 힘든 일 있거나 서운한 일 있으면 나한테 먼저 얘기해. 팀장님에게 다이렉트로 말하지 말고."

"아아, 네."


나는 동기들에게 가서 물어보았다.

"혹시 팀장님과 면담하셨어요?"

"아니요. 전 아직 안했는데 다른 신규선생님이 팀장님이랑 면담했다가 부서장님에게 혼나는 건 봤어요."

"왜요? 팀장님이랑 면담한게 왜 부서장님한테 혼날일이에요?"

"그게... 부서에 불만이 있었는데 그걸 부서장님이 아니라 팀장님에게 바로 말씀드렸나보더라구요. 그래서 팀장님은 부서장님 불러서 혼내시고. 그것 때문에 부서장님이 한동안 그 선생님한테 말 안 걸으셨잖아요."

"네? 그런 일이 있었어요?"

"어찌되었든. 이거 다 평가에 들어가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럴 거에요."

"아아..." 그랬다. 평가라서 그랬구나. 팀장님에게 우리가 잘못말하면 부서평가점수가 낮아지니까.


부서에서 두 번째로 높은 연차의 선생님이 나를 호출하셨다. 맞다. 그 나한테 키가 크니까 인사하는게 잘 안보인다고. 90도로 고개랑 허리 숙이라고 하시던 그 분이었다. 근데 그 날 따라 그 분의 표정이 너무 밝았다.

"00선생님."

"네?" 뭐지. 처음 들어보는 존칭이었다. 항상 나에게 반말만 하셨는데 갑자기 존칭이라니.

"요즘 힘든 일 없어요?"

"아아, 네..."

"쉬엄쉬엄 해요. 다른 사람들이 괴롭히거나 하지는 않나요?"

"아아, 네..." 너무 놀래서 선생님께서 저를 힘들게 하십니다라고 말 할 뻔 했다.

"00선생님이 요즘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거 알아요. 내가 더 성심성의껏 가르쳐 줄게요."

"아아, 네..." 


보다시피, 그랬다. '아아, 네'만 3번 말했다. 


"그리고 이번에 평가하는 거 알죠? 이번년도부터 신규들이 평가하는 점수비율이 높아졌더라구요. 전 뭐 다른 거 바라는 건 아니고 별 다섯 개면 됩니다. 별 다섯 개."


그렇구나. 이것도 평가를 위한 친절이었구나.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받은 평가용지에 별 다섯개를 모두 색칠했다. 익명도 아니었고, 그 두 번째로 연차가 높은 선생님에게 제출해야만 하는 서류였다. 절대로 솔직하게 작성할 수 없는 그런 종이. 


그리고 팀장님과의 면담도 5분도 채 안되어서 끝났다. 전 불만이 없습니다. 모든 선생님들이 잘 해주십니다. 이 두 마디에 면담도 빨리 끝났다.


나만 위의 사람들을 무서워하는 게 아니었나보다. 다들 자신의 위에 있는 사람들을 무서워하고 살고 있었다. 그 날은 의도치 않은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해서 머리가 아팠다. 그래도 그 거짓말이 내 회사생활을 조금만 편하게 해줄 수 있다면.... 난 기꺼이 스무 번이고 백 번이고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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