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간호사의 취준일기. 그대는 한 순간도 빛나지 않던 적이 없다.
열 다섯 번째, 나 자신을 부정해야 사회가 날 긍정했다
출근을 하는데 선생님들이 하시는 내 얘기를 듣게 되었다.
"00이 요즘 좀 나아지지 않았어요? 여기 신규들 중에 그나마 제일 적응 잘하고 있는 거 같던데."
"그러니까요. 걔보다 일찍 들어온 애들도 아직 어리버리한데. 00이 정도면 뭐."
어. 칭찬인가. 칭찬인가보다 했다. 그래. 그래도 내 노력이 헛된 것은 아니었구나 했다.
"그런데, 00이가 옷 좀 신경써서 입었으면 좋겠어요. 얘가 품위가 없어요."
"맞아요. 운동화 말고 구두도 좀 신고. 렌즈도 좀 끼고."
"ㅋㅋㅋㅋ 저번에 들고 다니던 가방 봤어요? 그 가방 전 무슨 거북이 등딱지인줄 알았잖아요. 무슨 책을 그렇게 많이 들고 다녀."
"아, 걔 그걸로 공부한데요. 의학도서관에서 나오는 거 저번에 어떤 선생님이 봤다던데"
"ㅋㅋㅋ여하튼 티를 내면서 공부해요. 아주."
그래. 이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찌되었든 고칠 수 있는 부분들이었으니까. 그래 그랬다. 난 이 세상에 맞춰서 내 자신을 바꿔가야만 했다.
휴일날, 백화점에 갔다. 그들이 말하는대로 내 모습을 바꿔야 했다. 옷, 가방, 구두를 골랐다. 얼추 내 월세만큼의 금액이었다. 이걸 입고 하루는 가도 둘 째날은 무슨 모습으로 가야한담. 하나를 해결하면 두 번째로 해결해야 할 것들이 남아있었다. 간호할 때 간호복 따로 입는데. 출퇴근 복장으로 이걸 사야 한다니. 근무 복장도 아니고.
점점 내 취향이 아닌 것들, 내가 아닌 것들을 사야만 했다.
그렇게 옷스타일을 바꾸고 렌즈를 끼고 구두를 신으니까 선생님들이 나를 단톡방에 초대해주셨다. 맞다. 저번에 내가 없었다던 그 친목 단톡방. 그 곳에 내 기수의 동기들은 없었다. 동기들 중 내가 처음으로 초대된 것이었다. 난 이제 그들과 커피를 마실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있었다.
그들과 어울리면서 많은 것들이 변해갔다. 우선 말투가 변했다. 평소의 나였다면 하지 않았을 까칠하고 예민한 말투를 나도 모르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선이 변했다. 내 뒤로 입사한 동기들이 실수를 할 때면 왜 저렇게 행동할까 탓을 하기도 했다.
내가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 난 내 자신을 잃어버린 거 같아 무서워졌다. 난 절대 그들처럼 되고 싶지가 않았다. 그들처럼 되고 싶지 않았는데 어느새 난 그들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학교 후배를 만나 밥을 먹는데 그 아이가 말했다.
"언니, 언니 분위기가 많이 바뀐거 같아요. 원래 간호사가 되면 다 그렇게 되는 거에요?"
"응? 왜? 뭐가 변했는데?"
"언니는 진짜 따뜻한 사람이었는데, 약간 예민해진 거 같아요. 아까 메뉴주문하실 때도 너무 무섭게 말해서 놀랐어요."
"내가? 난 그렇게 말했다고 생각 안했는데?"
"아니에요. 언니 진짜 많이 변했어요."
주위를 둘러봤다. 그랬다. 그렇게 돈을 쓰고 시간을 쓰고 노력을 했는데 결국 남은 것은 나에 대한 부정 뿐이었다. 내 취향의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사랑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거울 속에는 남들이 바라는 모습의 내가 서 있었다. 내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내 자신을 부정해야만 사회가 긍정해주고 그나마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 자신을 부정해야 하는 일을 그만 둘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