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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촌자 Jan 22. 2020

찬란한 제국, 불타는 로마

이탈리아 사진 기행

매콤한 국물에 김치랑 밥으로 점심 배를 채우고 나니 에너지 만당(滿堂). 역시 밥이 보약이다. 

ㄴ 

트레스테베레를 지나 나보나 광장, 판테온, 트레비 분수를 둘러보고 스페인 광장에서 저녁노을을 맞이하는 오후 일정. 

트레스테베레는 “테베레강을 지나”라는 의미니까 서울로 치자면 강남. 골목마다 먹거리 맛집이 풍부하니 강남 중에서도 이곳은 가로수길 정도 되겠다.

다리를 건너 조금 지나면 캄포 데 피오리라는 광장이 나온다. 꽃의 들판이라는 의미로 예전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허허(虛虛) 목초지였는데 지금까지도 건축물로 개발된 적이 없는 광장. 근처의 길 이름이 재미있다. 석궁 장인의 거리, 커피 제조업자의 거리, 열쇠수리공의 거리, 제단사의 거리 등 광장에서 거래가 일어나는 업종의 이름을 썼다. 이른바 실용주의 작명. 숙소가 근처여서 호스트한테 물어보니 구경만 하고 지갑은 열지 말란다. 관광지 인심이 거기서 거기. 로마나 부산 해운대나 다 비슷비슷하다.


광장 한가운데 왠지 어두운 분위기의 동상이 보인다. 

CC BY daryl_mitchell SA 2.0 License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Giordano_Bruno

약간은 침울한 듯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는, 이단으로 몰려 종교재판으로 화형을 당한 조르다노 브루노의 동상. 레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위고를 포함한 지식인들이 사상의 자유를 위해 순교한 브루노를 기리며 1899년 피오리 광장에 건립한다. 조용히 책을 들고 한 발을 앞으로 내딛고 있는 모습은 과학과 지식 나아가 학문의 진일보(進一步)를 말하는 듯하다.

아테네 학당에서 유독 아리스토텔레스만 신발을 신고 있고 나머지 분들은 전부 맨발일 때 알아봤어야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과 기독교 교리를 접목하여 스콜라 철학을 완성한다. 태양중심 사상을 강조한 플라톤은 왼쪽이고, 지구 중심 인간 중심을 강조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른쪽.


신플라톤주의 철학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추론되었으며 조르다노 부르노는 코페르니쿠스를 추종하지는 않았지만 많은 부분 생각을 같이 했다. 다만 우주의 중심이 태양이라는 코페르니쿠스의 생각과는 달리 부르노의 생각은 무한 우주론이었다는 점에서 다르다. 지구가 중심이냐 태양이 중심이냐를 놓고 논쟁을 하면서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이단으로 몰리기는 했지만 다들 유한 우주론의 한도 내에서의 논쟁. 하지만 부르노는 나중에 개신교로 개종하긴 했지만 로마 카톨릭의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사로 활동했던 사람이 무한 우주론을 주장하니 교회 입장에서는 타협의 여지가 없었지 싶다. 무한 우주론은 <관측 가능한 우주> 개념이라서 무신론으로 이어진다. 관측가능하지 않은 우주도 존재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교회의 입장에선 많이 곤란하다. 

에어비앤비 숙소 건물. 5층이라고 쓰여 있지만 6층이라고 읽어야 한다. 가방 들고 올라가다가 몇 번이고 욕을 할 뻔했으니 아무래도 추천은 어렵다. 600년이 넘은 건물이라고 하니 건축 연도가 1400년이라고 가정해도 태종 이방원이 왕자들 다 죽이고 왕이 되는 피바람이 불던 즈음. 그 정도면 이미 골동품이라 펜스 세워서 사람 손 닿지 않게 잘 보관해야 하건만 아직도 식당으로 또 주택으로 요긴하게 쓰고 있다. 

근처에 있는 이 건물은 숙소 건물보다 더 오래되어 적어도 650년은 되어 보인다. 1350년이면 고려 공민왕. 조선왕조 500년을 건너뛴다. 사극도 한참 사극. 민속촌이 아니라 도심 한복판에 이런 건물이 버젓이 그리고 여전히 예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나보나 광장. 나보나는 큰 배를 뜻하는데 예전에 경기장으로 사용될 당시 물을 채우고 배를 띄우기도 했는데 그때 갖다 놓은 큰 배를 가리키는 말.  


남쪽에서 광장으로 들어서면 왼편으로는 성녀 아녜스를 기리기 위해 순교한 자리에 지어진 산타네셰 인 아고네 성당이 있다. 나보나 광장은 초기엔 전차 경기장으로 쓰이다가 후엔 시장으로 쓰이기도 했는데 교황 인노첸시오 10세 취임 후 이 일대를 정비하는 작업을 한다. 하지만 알고 보면 교황의 패밀리가 이 일대를 소유하고 있어 사실상 가족 부동산 개발 사업인 셈. 광장을 네모 반듯하게 정비하고 교황의 가족 궁전인 팜필리 궁과 성당도 정비하고 오벨리스크를 분수로 만들어 광장 한복판을 장식한다. 

로벤초 베르니니의 4대 강 분수. 4대 강은 나일강(아프리카), 갠지스강(아시아), 다뉴브강(유럽), 라플라타강(남미).  이건 또 뭔가?  교황 가족 부동산 개발 사업에 4대 강? 이런 것도 평행이론? 암튼 나쁜 것은 깜빡하고 비켜가는 법이 없다. 


오벨리스크라는 것이 태양숭배와 관련이 있어 양의 기운을 상징하는 물건인데 그 아래에 분수를 기획하는 건, 장작 준비해 놓고 아궁이에 물 붓는 것. 모르고 그랬을 리가 없다. 이 당시 로마는 교황령에 속한 시기였으나 고대 로마 제국 시절 승전 기념물로 가져온 오벨리스크를 마음대로 없애지는 못하고 태양신의 의미만 퇴색시키는 방책의 일환으로 물을 선택한 것.

나보나 광장에 물을 채워서 경기하는 모습. 1652년부터 1866년까지 매주 주말 토, 일은 광장에 물 받아서 물놀이한다. 그림으로 봐선 배를 띄우긴 곤란하고 마차로 물놀이하는 정도. 한 여름 로마가 너무 더우니 일견 이해가 되긴 한다.  베르니니의 4대 강 분수가 완성된 것이 1651년이니 그다음 해부터 광장에 물을 채우고 유흥을 즐긴 거다. 이탈리아가 통일되어 이탈리아 왕국이 들어서는 시기가 1861년이고 토리노 정부가 1865년까지 였으니 1866년 베네치아를 병합하면서 피렌체로 수도를 옮기는 시기에 물놀이도 중단된다. 


참고로 1849년 이후 교황령에 주둔하던 프랑스군이 1870년 프랑스와 프로이센 간의 전쟁으로 철수하자 이탈리아 정부에서 무력으로 교황령을 점령하고 주민투표를 통해 병합시키면서 1871년부터 로마는 명실상부한 통일 이탈리아 수도가 된다. 교황청 입장에선 교황령이 소멸되어 1929년 무솔리니 이탈리아 정부와 체결한 라테라노 조약으로 바티칸 시국이 합법적으로 인정될 때까지 교황 주권 상실의 잃어버린 57년을 맞이하게 된다. 

4대 강 분수를 기획한 베르니니와 그의 제자 보로미니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애증이 있었는데 말은 애증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베르니니의 일방적인 시기와 질투. 베드로 성당 공사 중에 무리하게 종을 올리다가 건물에 금이 가는 일이 생겨 교황의 눈밖에 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보로미니가 전면으로 부상하게 되어 성 아그네스 성당을 설계하여 작업을 진행한다. 절치부심하던 베르니니는 4대 강 분수 공모에서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당선하여 보로미니를 향한 시기와 질투를 드러내 놓고 표현하기 시작한다.  그 여파로 남은 것이 사진 오른쪽 나일강을 상징하는 거인상 얼굴에 수건 씌우기. 성당 쪽을 보지 않으려 수건을 뒤집어쓰고 있는데 일부에선 완공시점이 4년이나 차이가 나서 지어낸 루머일 뿐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실이라는데 500원 건다. 왜냐하면 그 후로도 계속되는 베르니니의 시기와 질투로 보로미니는 우울증에 시달리다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때문. 

나보나 광장을 지나 판테온으로 이동. 지금 건물이 서기 125년에 재건되었으니 1900년 가까이 된 문화유산을 관광객들에게 무료로 공개하고 있다. 하지만 조만간 입장료를 받을 예정. 다행인 것은 고대 로마 건축물 가운데 현존하는 것 중 가장 보존상태가 좋은데 그 이유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교황에게 판테온을 넘겨주었고 이를 받은 교황이 성당으로 개축하였기 때문에 중세 초기 다른 고대 로마 건물들처럼 파괴와 약탈을 당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 철근 없는 콘크리트로 건축한 것이라 현대 건축기술로도 새로 지으려면 힘들 정도라고.

M·AGRIPPA·L·F·COS·TERTIVM·FECIT 

라고 쓰여있는데 M·AGRIPPA는 마르쿠스 아그리파 L·F는 루시우스의 아들 COS·TERTIVM·FECIT는 집정관 세 번째 임기라는 의미.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하고 아그리파가 모든 신에게 바치는 신전을 건축했는데 로마 대화재로 불타고 새로 지어졌으나 원래 건물에 있던 현판 돌은 그대로 사용했다. 


정면에서 보면 2번째와 7번째 기둥 뒤쪽에 뭔가 있었던 흔적이 있는데 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친구 아그리파의 동상이 있었던 곳. 건축하시는 분들에겐 판테온 건물 전면부의 코린트 양식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포르티코의 의미가 중요하다고 하는데 왜 중요한지는 여기서는 패스 ^^. 


헉~ 여기도 오벨리스크 분수… 이거슨 아니지.

넵튠(포세이돈),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

분수랑 궁합은 뭐니 뭐니 해도 포세이돈. 이런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조합이다. 다시 보니 포세이돈도 머리가 어지간히 크다. 아래에 있는 말은 그의 상징. 그래서 포세이돈은 말의 신이라고도 불린다.

CC BY Shawnlipowski SA 3.0 License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판테온_(로마)

학창 시절 미술을 워낙 못해서 화실을 3달 정도 다닌 적이 있는데 그때 봤던 석고상을 이번 이탈리아 사진기행하면서 다시 찾아보게 된다. 쥴리아니의 턱선도 반갑고 아그리파의 기백 넘치는 모습도 오랜만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자신의 오른팔 부르투스한테 암살당하기 전 후계자로 아우구스투스를 지명하고 그의 유약함을 염려하여 아그리파를 후원자로 낙점해 놓은 것이 후일 아우구스투스 체제 완성의 결정적인 신의 한 수가 된다. 실제 아우구스투스의 모든 전쟁의 승리는 아그리파에서 비롯되었고 아그리파 군대 덕분에 제2차 삼두정치를 구성할 수 있었고 안토니우스와의 최후의 결전 악티움 해전을 승리로 이끌어 아우구스투스가 황제가 되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CC BY Cmglee SA 3.0 License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Pantheon,_Rome

바닥에서 천정까지 높이와 돔의 지름이 43.3미터로 같다. 그래서 43.3미터 공을 넣으면 빈 공간 없이 꽉 찬다. 

CC BY Victor Grigas SA 4.0 License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Pantheon,_Rome

빅터 그리가스라는 분이 바닥 한가운데 누워서 어안렌즈(Fisheye lens)로 찍은 사진. 상하좌우대칭의 절묘함이 신비롭다. 

벽속의 숨은 아치도 판테온 건축의 핵심중의 하나. 아치구조가 가지는 구조적 견고함만으로 외부의 추가 지지나 내부의 기둥 없이 돔의 무게를 지탱하도록 설계한 것. 아치와 아치가 만나는 접점에 힘이 모이게 되니 그곳을 집중적으로 튼튼하게 하면 되니까 힘의 분산과 선택적 집중이 가능하다. 

교황 우르바노 8세가 판테온 현관 천정의 청동을 녹이라고 명령을 했는데 바티칸 산탄젤로 성의 방어를 위한 대포를 만드는데 쓰였으며 일부 베르니니의 발다키노 제작에 투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두고 “바바리안(야만인)도 하지 않을 일을 바르베리니안(우르바노 교황의 본명이 마페오 바르베리니)이 했다”는 비아냥이 로마에서 돌았을 정도. 이 청동문은 끝까지 살아남아 복원에 성공한다. 아무리 청동이 필요해도 문을 떼어낼 정도는 아니었으니 그나마 불행 중 다행. 

바닥에 보이는 것은 천정의 구멍을 통해 비가 들어올 경우에 대비한 배수장치. 바닥에 원형으로 된 대리석 바닥 한가운데 조그만 점 두 개가 그것이다. 비가 많이 오는 경우가 아니면 기압 차이 때문에 비가 잘 들어오지 않는다. 


뒤로 보이는 바위의 성모 조각상 아래, 평소 판테온에 묻히길 소원했던 라파엘로의 무덤이 있다. 

트레비 분수로 가는 길에 만난 꼭지 없는 수도. 로마에선 길가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물을 지배했던 로마답게 수량도 넉넉하다. 

유수불부(流水不腐)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움직이고 노력하라는 가르침을 주는 듯. 이렇듯 어차피 물은 흘러가게 되어 있으니 분수를 만들어 더위를 식히려 했던 로마인들. 그래서 로마엔 분수가 많다. 

판테온에서 트레비 분수로 가는 길에 찰리 채플린 복장을 한 사진 찍는 처자. 구경하며 걸어가는 커플을 다짜고짜 사진을 찍고는 한 장 건넨다. 공짜니까 그냥 가져가라고. 사진을 찍고 인쇄하여 건네는데 걸린 시간이 1분이 안 걸렸다. 사진 찍은 후 바로 오토매이터(Automater)나 매크로(Macro)를 돌려서 프린트가 되도록 세팅을 해 놓았지 싶다. 간단하지만 이 정도는 노력을 해야 한다.

런던 빅벤에서 만난 슈렉 복장의 사기꾼들, 피렌체에서 그림 깔아놓고 밟으면 그림 사라고 협박하는 사기단. 그들에 비하면 비록 얄궂은 종이 쪼가리이긴 하지만 이 또한 여행의 추억이다. 약소하더라도 고마움의 표시를 하고 나니 행복하다.  

로마시대 물을 공급하던 수로가 끝나던 곳이었는데 트레비 구역 내에 위치하여 트레비 분수라고 불린다. 트레비는 세 개의 길이라는 뜻으로 분수 바로 옆 크로시페리 광장으로 모이는 길이 오래전에는 3개가 있었고 그래서 트레비라고 불렸다.


교황 우르반 8세가 이곳에 분수를 짓기로 하고 베르니니한테 설계 맡겨놓고 서거하여 중단되었으나 교황 클레멘스 12세가 다시 분수를 짓기로 하고 공모전을 열어 니콜라 실비가 당선된다. 1732년 착공하지만 니콜라 실비는 1751년 분수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는데 혹시라도 후대 건축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망칠까봐 설계도를 꼼꼼하게 남겼다. 그래서 가운데 서 있는 동상이 포세이돈이 아니라 대양의 신 오케아노스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양옆에서 말을 끌고 있는 바다의 신은 트리톤이라는 것이 설계도에 표시되어 있다고. 포세이돈은 말의 신. 그래서 포세이돈 대신에 말을 넣었으니 포세이돈의 의문의 1패. ^^ 왼쪽은 격동의 거친 바다를 그리고 오른쪽은 고요한 바다를 상징. 분수의 물이 격동할 수는 없으니 말이 대신 요동친다. 아무튼 분수는 물의 신과 함께 있어야 제맛.


여기서 잠깐. 그리스 로마 신화의 족보를 잠시 살펴보고 넘어가자. 트리톤은 포세이돈 아들. 오케아노스와 트리톤의 조합은 또 뭔지 살짝 궁금. 오케아노스의 아버지가 우라노스, 포세이돈 아버지가 크노로스이고 할아버지가 우라노스. 그리고 크노로스가 우라노스의 막내아들이었으니 오케아노스는 포세이돈의 큰 아버지. 

분수 뒤 건물 오른편 아래를 보면 금이 간 것을 볼 수 있다. 역시 물과 세월은 닮은 점이 많다. 가까이 오래 하면 모양을 온전하게 보전하기가 쉽지 않으니 그러하다. 2013년 이탈리아 패션회사 펜디(Fendi)에서 220만 유로를 기부하여 복구하였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동전 던지기를 하며 복구비용을 보태고 있지만 여전히 파손되고 마모되고 있다. 


오른손에 동전을 들고 왼쪽 어깨너머로 던져야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니 기왕에 던질 거면 알고 제대로 던지자. 이렇게 던진 동전이 매일 3천 유로 정도 된다고 하는데 모아서 문화재 유지 보수 비용으로 쓰고 있다. 이걸 또 훔쳐가려고 자석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어 저녁엔 경비를 세워야 할 정도. 동전이 자석에 붙는다고 하길래 집에서 확인해보니 유로 동전은 신기하게도 자석에 반응을 하는데 미국 동전과 한국동전은 무덤덤. 유로화는 자동판매기에서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서 니켈 성분의 함량에 철분을 포함시킨다고 구글에서 알려준다.

영화 <로마의 휴일>의 촬영지로 소개되어 관광객들에겐 익숙한 곳이라 여행 온 학생들도 많고 단체여행객 자유여행객 가릴 것 없이 일단 사람이 많다.  이런 곳에선 소매치기 조심은 기본.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들렀던 트레비 분수 옆 젤라토 가게. 이번에는 애들 엄마와 함께 다시 그곳을 찾는다. 이탈리아를 16강전에서 꺾고 8강에 진출하는 역사적인 순간에 이탈리아에서 먹었던 젤라토. 그때를 생각하니 또 소오름. 

해는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거리엔 관광객들의 분주한 발걸음으로 그득하다. 이제 로마의 석양을 맞이하러 간다. 

스페인 광장과 연결된 명품거리 콘도티. 지름신 강림 조심하시라. 어영부영하다 보면 어느새 다녀가셨다.^^

CC BY Daniele.Brundu 4.0 License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Fontana_della_Barcaccia

피에트로 베르니니가 제작한 바르카치아 분수. 나보나 광장의 4대 강 분수를 만든 로렌초 베르니니의 아버지. 분수 전문 패밀리 조각단. 바르카치아는 파손된 배라는 뜻인데 스페인 광장의 근처의 수압이 약해서 분수가 작동하게 하려고 가라앉은 배를 기획했다고 하니 제대로 스마트하시다. 

예전엔 여자들이 이 거리에서 쇼핑을 하는 동안 남자들은 스페인 광장 계단에서 젤라토 먹으며 기다리고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이 젤라토 먹는 장면이 영화에서 소개된 이후 이곳 젤라토 가게는 대박 나고 청소하시는 분들은 폭망. 계단에 흘린 젤라토는 차량으로 청소를 할 수 없으니 일일이 사람이 치워야 한다. 하지만 이젠 문화재 보호의 명분으로 계단에 앉아 있는 것 금지. 앉아서 1분만 있어도 어디선가 경찰이 나타나선 일어나라고 하니 난감하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계단이 깨끗하고 오르내릴 공간이 넉넉해서 좋다. 


17세기 스페인 대사관이 들어오면서 스페인 광장으로 불리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스페인 계단은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이 7번이 지나고 50년째의 해인 쥬빌리 1725년에 착공된다. 쥬빌리는 용서하고 화해하고 회복하는 의미가 있는데 계단 하나 공사를 하는데 쥬빌리의 의미를 빌려와야 했던 이유가 있다. 

François Marius Granet의 1808년 작. 트리니타 데이 몬티 성당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Trinità_dei_Monti

예전엔 오벨리스크 앞은 절벽이었고 광장을 연결하는 계단이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프랑스와 스페인은 엄청 치고받고 싸우는 사이. 그 사이에서 군사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던 교황은 외교적 줄다리기로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는데, 프랑스가 강할 땐 스페인을 불러오고 스페인이 강해지면 프랑스를 불러오는 식.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가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와 처음 경쟁할 때는 교황은 카를 5세 스페인 편을 든다. 왜냐하면 그 당시 프랑스의 전력이 너무나도 막강하여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프랑수아 1세가 파비아 전투에서 카를 5세한테 대패하고 포로로 잡혔다가 프랑스로 돌아가고나니 이제 카를 5세의 세력이 부담스럽다. 거기다가 그가 지배하는 나폴리 왕국은 로마에서 불과 40마일. 그러니 교황은 프랑스로 돌아가서 조약을 파기하면서 복수를 준비하는 프랑수아 1세와 손잡고 카를 5세와 경쟁하려 코냑 동맹을 형성한다. 그렇게 교황은 조약 파기를 승인해주면서 프랑스 편이 된다. 교황의 배신에 열 받은 카를 5세는 면죄부 발행으로 종교개혁의 바람이 거센 틈을 타서 교황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루터교 병사들을 로마에 투입한다. 그 당시 이들은 교황을 잡으면 숨통을 끊어 놓겠다고 밧줄을 옆에 차고 다닐 정도. 그런 이들을 급여를 주지 않고 굶주린 늑대로 만들어 보냈으니 로마의 약탈은 불을 보듯 뻔한 일. 로마의 약탈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1527년에는 그 정도가 최고조에 달해 3세 이상의 어린이도 목숨 값을 내어야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니 아비규환이 따로 없다. 

CC BY Bernard Van Orley 3.0 License  파비아 전투. 총의 등장, 기사 계급의 몰락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

성공과 실패의 연속이긴 했지만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며 우여곡절을 겪었던 교황청의 입장에서 카를 5세 사망 후 재산분배로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스페인이 분리되었으니 프랑스와 스페인은 화해의 분위기를 거부할 이유가 없던 시기였고 그런 의미에서 쥬빌리는 더없이 좋은 명분. 


트리니타 데이 몬티 성당과 스페인 광장을 연결하는 계단이 135개인데 좋은 관계 영원하라고 계단의 개수도 영원을 상징하는 9 (1+3+5). 숫자 9가 왜 영원의 상징인지 아시겠지만 혹시 모르시는 분을 위해 사족을 단다. 9x1=9, 9x2=18(1+8=9), 9x3=27(2+7=9)…. 9x9=81(8+1=9)….. 9x38=342(3+4+2=9)… 이렇게 9는 어떤 수를 곱해도 그 결과의 합은 다시 9가 되어 예로부터 영원을 상징해왔다. 그 기원은 이집트라고 하는데 아니라고 하셔도 들이댈 증거가 없으니 따지지는 마시라. ^^

스페인 광장에서 스페인 계단으로 이어진 언덕 위로 올라가면 트리니타 데이 몬티 성당이 나온다. 성당의 전면부는 미켈란젤로의 후계자 자코모 델라 포르타가 디자인했는데 왼쪽 시계는 여러 블로그를 살펴봐도 고장이 났는지 항상 같은 시간이고 오른쪽 시계는 해시계 비슷하다. 그 아래엔 문장(紋章)이 2개 있는데 왼편에 있는 것은 2019년 현재 교황인 프란치스코 교황의 문장. 다른 하나는 물고기 2마리 표시만 있는 검소하고 소박한 문장인 걸로 봐서 파올라의 성 프란체스카 미니미 수도원 문장인 것 같기는 하지만 트리나타 데이 몬티 성당의 문장인지 미니미 수도원의 문장인지 찾아봤지만 아직은 확인할 길이 없다. 아무래도 성당에 다시 가서 확인을 해야 하지 싶다. 이래서 로마에 한번 더 가야 할 이유가 생긴다. ^^


프랑스 루이 12세가 나폴리를 침공하여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그전부터 있던 수도원 옆에 1502년에 지은 성당인데 오늘날까지도 이 언덕과 성당은 프랑스 소유. 루이 12세가 북쪽 밀라노를 침공했는데 그걸 축하하기 위해 성당을 왜 로마에 지으며 그게 또 왜 프랑스 땅이 되는지 궁금하여 찾아보니 사연이 좀 복잡하다. 

프랑스 루이 11세가 병색이 깊어져 그 당시 세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던 파올라의 성 프란체스코 수도사로부터 임종기도를 받기를 원했으나 수도사는 교황의 허가 없이는 이태리를 떠날 수 없다고 하여 식스투스 4세의 허락을 받고 프랑스로 간다. 이에 감사한 마음으로 세상을 떠나고 후계자인 샤를 8세와 루이 12세도 파올라의 성 프란체스코를 믿고 따른다. 그래서 미니미 수도회에 뭔가 기여를 하고 싶었던 차에 루이 12세가 밀라노 침공하면서 자축의 명분으로 미니미 수도회가 있던 자리에 현재의 트리니타 데이 몬티 성당을 짓게 된 것.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이며 돌아다닌 알찬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 해가 지는 방향으로 가톨릭 성당의 돔들이 줄지어 서 있다. 우연(偶然)일까 필연(必然)일까? 

세로토닌, 도파민, 옥시토신의 3종 세트가 넘쳐나는 사랑을 부르는 스페인 계단. 세로토닌의 은근하고 소소한 행복함, 짜릿하고 자극적이지만 힘들었던 하루를 잊게 해주는 도파민, 그리고 스킨십을 불러오는 옥시토신. 그러니 저녁노을의 마감 임박 신드롬 효과가 주는 도파민에 장미 한 송이가 주는 세로토닌의 로맨틱함, 거기다 옆에 있는 누군가가 주는 옥시토신이 합쳐지면 저녁노을 마법의 계단에서의 프러포즈는 실패하는 법이 없다.

서산으로 해가 지고 난 후 딱 1분. 하루 중 하늘이 가장 황금빛으로 물드는 시간. 로마의 촉촉함에 노을은 더욱 황금빛으로 물든다.

유혹의 거리 비아 데이 콘도티를 따라 숙소로 돌아가는 길. 지갑은 열리지 않았고 무사히 숙소에 도착했다. 스페인 광장이여 잘 있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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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li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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