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근 회고전
캔버스에 사람 키만큼 긴 몸체가 달린 넓적한 붓으로 검은 먹을 풀어 천천히 그어내리고 또 다시 덧칠해 내려가고, 먹물은 스며들고 번지고 층을 이루며 쌓인다. 겹겹이 쌓여 하나가 되는 행위의 반복. 반복. 또 반복. 그 반복적 작업 안에서 인내와 고뇌가 쌓이고 철학적으로 번져간 사유는 한 폭의 정갈한 작품으로 남았다. 한 획 한 획을. 그렇다면 품격은 무엇이냐. 인간이 바로선다는건 무엇이냐. 고뇌하고 또 고뇌한 윤형근의 산물들. 그 생각의 산물은 그의 그림작품에서 뿐이 아니라 그의 메모 노트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공개 된 노트 메모는 사실 몇 장 되지 않지만, 그중에서도 마음에 드는 두 쪽을 적어놓는다.
내 그림은 그림 같지 않은 그림, 글씨 같지 않은 글씨 인지도 모른다.
아무렇게나 생긴 나무토막이래도 좋고 불탄 서까래라도 좋다.
잘생긴 나무토막 보다 못생긴 나무토막이 두고두고 볼만하다.
그 나무토막에 되도록 손을 안 댄 상태가 좋다.
내 솜씨가 지나치게 나타난 것은 보기가 싫다.
그래서 만지다 버린 것 같은 것이 정이 간다.
솜씨를 너무 부리면 매끄러워지고 딱딱해지기 일쑤다.
1984년 12월 21일 밤의 기록
아름답다는 것은 무엇이냐
제일 고생스럽게 산 게 아름다운거지.
가장 오래 견디고 고생한 것.
아름다움이라는건 인간 내면의 세계인데, 그것은 인품의 고하에 달렸다고 했어.
품격있는 사람이 점 하나 찍어야 아름답지.
품격없는 사람이 점 하나 찍은거하고는 천지 차이지.
그러니 서양사람들은 절대 이해 못할거야.
그림만 잘 하면 됐지 그사람 사생활이 무슨 상관이냐고 하지.
인간이 바로서야 작품이 바로서고 그게 가장 좋은 작품이 아닌가.
나는 그거지.
한 두 점 찍어서는 그게 그것 같지만, 오래 깊이 두고 보면 그게 드러난다고.
윤형근, 파리 갤러리 제작 인터뷰 중
예술이란 권투선수 같이 힘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정치가 같은 지략으로 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예술이란 오직 인간의 가슴으로만 이루어지는 것 같다.
1980년 7월 5일의 기록
윤형근
윤형근 화백(b.1928)은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 한국 현대미술의 중요한 미술운동이었던‘한국 단색화’의 대표적 작가로서, 이는 한국의 전통적 자연관에 의해 탄생된 독창적이고 유일한 직관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의 작품은 ‘태운 암갈색과 군청색의 블루’라는 두가지색의 물감과 마포 캔버스의 만남이라는 단순한 형식을 지니고 있다. 생 섬유질인 마포 캔버스 위에 반복적으로 그어놓은 단순한 선들은 깊이 있는 면으로 겹쳐지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며 주위의 여백과 더불어 강한 흡인력으로 관람자를 감동시킨다. 작가 본인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자연과 가까운 것’이라고 하듯이, 그의 작품은 무위자연의 동양정신을 담은 간결하고 힘찬 느낌을 동반한다. 자연을 닮은 그의 그림은 부르덥고도 강인하며, 우호적이자 명상적이다. 윤형근 화백은 1957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80년부터 프랑스에 머물며 아카데미 그랑쇼미에르를 수료하였다. 1990년대에는 경원대학교 총장을 지니기도 한 화가이자 교육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