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새해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예전에는 새해가 되면 설레는 마음으로 올해 이루고 싶은 일과 그 일을 이루기 위해 해야 할 일을 적어 내려가곤 했다. 마음 한편에는 한 살 한 살 늘어가는 나이에 맞춰 내가 이뤄내야 할 일들을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사람이 시간에 그은 경계를 흩트려보는 중이다.
자연스럽게 흐르는 시간에 선을 그은 것은 사람의 일이다. 한 해에 지구가 한 바퀴 돌고 계절이 바뀌니 자연에도 시간의 경계가 있는 것 같지만, 그 한 바퀴에 1년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열 두 조각으로 나눈 것은 사람이 한 일이다. 12월 31일 밤에 잠들고 다음 날 일어나면 새해다. 1월 1일의 나는 어제보다 딱 하루만큼 다를 뿐인데. 새삼스럽게 새해 계획을 세우고 새 사람이 되어보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은 나에게 좀 요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시간에 경계를 그었기 때문에 우리 삶 속 편리한 점이 많다는 것을 안다. 새해를 맞이하여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뤄나가는 이들의 삶 또한 멋지다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새해 계획을 세우지 않는 것은, 계획이 없어도 삶이 자연스럽게 내게 주어야 할 것들을 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연의 일이다.
나는 인간이라 나의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 순으로 배열된 직선으로 인식하지만, 자연의 시간은 좀 다른 것 같다. 자연은 과거나 현재, 미래가 마구 얽혀있는 그물망처럼 느껴진다. 수만 년 동안 한 자리에서 흐르는 강물을 보고 우리는 늘 그 자리에 있는 강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사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내가 강물에 손을 담갔을 때 내 손을 스치며 지나가는 물은 매 순간 새로운 물이다. 하지만 그 물은 수백, 수천 년 전에도 이 강물이었을지 모른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산을 타고 내려와 강을 이루고 바다로 흘러가, 다시 수증기가 되고 비가 되어 내린다. 그렇게 억겁의 세월을 돌고 돌며 나무도 되었다가, 새도 되었다가, 바다도 된다. 그러다 다시 비가 되면 한 방울 정도는 강이 되어 이전에 흘렀던 그 강에서 다시 흐를 수 있지 않을까.
모든 것이 북적북적 살아 숨 쉬는 숲에서는 어떤 생명의 죽음이 다른 생명의 삶이 된다. 한 생명이 죽으면 다른 생명이 장례를 치르고, 죽은 생명의 생은 산 생명의 세포로 삶을 이어간다. 인간 세계의 장례절차는 자연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드물지만 야생동식물은 순환한다.
자연에는 ‘지금 여기’밖에 없다. 모든 생명은 그 지금 여기를 살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자연에서는 (인간의 개입이 없다면) 일어나야 할 일들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한 걸음 물러나서 바라보면, 그 모든 것이 잘 짜인 그물망처럼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는 모습이 경이롭다. 내 삶이 그러한 자연의 모습을 닮았으면 했다. 계획이 없이도 하루하루 지금 여기를 살아내는 삶. 매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삶. 그리하여 내가 겪어야 할 것을 자연스럽게 겪고, 내게 일어나야 할 일들이 일어나는 삶. 그 삶 속에서 열매 맺는 기쁨. 이런 것들을 바라며 한 해를 꾸려나간다.
촘촘한 새해 계획 대신 한 해를 어떤 마음으로 살아낼지 의도를 세워본다. 내 삶이 자연의 흐름을 닮아가기를, 자연이 그러하듯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으로 한 해를 살아내기를.
이미지 출처 : pexels.com - Jess Bailey Desig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