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
아들을 보내고 벌써 1년이 지났다. 지난 1년, 부족한 나 자신을 책망하기도 하고, 하늘의 뜻이니 어쩔 수 없었다고 애써 묻기도 하고, 그래도 하늘나라에서는 더 편안하겠지 위안을 삼기도 하며 살아냈지만 아직도 아들이 왜 내 곁에 없는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종종 머리 아프단 소리를 했을 때 내과나 이비인후과가 아닌 대형 병원에 데려갔으면 어땠을까? 아이가 쓰러지고 응급차가 오기 전까지 내가 뭔가 제대로 응급처치를 했더라면 달라졌을까? 응급실에 들어갔을 때 간호사가 애 호흡이 이상하다고 했는데 왜 응급차 안에서 아이에게 산소호흡기를 씌우지 않았을까? 담당의사 말로는 아들은 선천적 뇌동정맥 기형이고 뇌 상태로 보아 밤새 뇌출혈이 있었을 거라고 했는데 아이는 분명 아침에 두발로 내게 걸어오고 있었고 이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1년 내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맴돌았지만 아마도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답을 얻지 못할 것이다. 너무 애통하다. 너무 허망하다. 너무 말도 안 돼서 매일 되살아나는 악몽처럼 1년을 살았다.
2020년 7월, 무더위가 한창 무르익어 갈 무렵 아들은 갑자기 하늘로 떠났다. 여느 때처럼 아침에 일어나 내게 걸어오고 있었는데 쓰러져 눈을 감은 이후 다시 눈을 뜨지 못했다. 그해 가을 아들을 기리며 인근 공원에 헌수 한 나무에 낙엽이 지고 눈이 쌓이고 새싹이 돋고 꽃을 피우고 어느덧 그렇게 2021년, 아들의 1주기가 되었다. 자식을 먼저 보낸 엄마들은 기일이라는 말 대신 기일을 하늘 생일이라고 부른다. 조금 억지스러운 감도 있지만 기일보다는 듣기 좋으니 나도 내 캘린더에 그렇게 입력을 해두었다. 그리고 나는 필요 이상으로 우울해지지 않으려고 거듭 마음을 다잡으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전 아들의 휴대폰 번호가 오랫동안 미사용으로 확인되어 통신사에서 자동 해지를 통보해왔고 기일을 맞아 가족, 친구들과 함께 미사 참례를 계획했으나 코로나 확산으로 4단계 거리두기가 실행되며 성당도 문을 닫아버렸다. 뭐 이리 해줄 수 있는 게 없는지 너무 미안해서 자꾸 눈물이 났다.
가끔 사람들은 나에게 대단하다고 말한다. 너니까 그래도 버틴다며 자기 같으면 못 살았을 거라는 말도 덧붙이는데 이게 칭찬인지 뭔지 잘 모르겠다. 너무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말하면 솔직히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난감하다. 실은 나도 꽤 힘드니 그런 말 말라고 정색해야 할지 암 잘 지내고말고 하면서 씩 웃어 보여야 할지... 아직도 어렵고 애매하다. 하지만 나는 보란 듯이 내 눈물과 슬픔을 참아가며 구태여 사람들 앞에서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은 일절 없다. 어떤 사람들은 남은 자녀들 생각해서라도 참아야 한다고, 자꾸 눈물 보이면 남은 자녀들이 불행해지니 더 굳세지라고도 하지만 그런 말도 크게 담아두지 않는다. 모든 것이 관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결국 내 인생이고 내 슬픔이다.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온전한 내 것. 남은 평생 아들을 그리워하며 슬퍼하는 것도 내 모습이고, 금쪽같은 큰 아들을 잃고도 남은 생을 포기하지 않고 이전처럼 잘 살아가는 것 또한 내 모습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꾸역꾸역 터져 나오는 울음을 열심히 삼키며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는 하늘에 있는 아들 때문이다. 비록 내 곁에 없는 아들이지만 내가 힘들면 가장 가슴 아플 녀석이기에......
정말 나무랄 곳 없는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어릴 때부터 어딜 데리고 다녀도 어깨가 으쓱할 정도로 준수한 외모 덕분에 잘 생긴 사람은 지나가다가도 떡 하나가 더 생기는구나를 깨닫게 해주는 아이였다. 배 밀고 기어 다니던 아기였을 때부터 조심스러운 성격 덕분에 집안 곳곳에 안전장치를 전혀 하지 않아도 사고 한 번 친 적이 없었고 불과 얼마 전까지 산타 할아버지며 이빨요정의 존재를 믿었던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미국에서 나고 자라 한국어가 서툴렀지만 한국에 온 이후로 매년 전교 임원 선거에 나가 당선될 정도로 학교 생활에 적극적이었고 단 한 번도 학교나 학원 가기 싫다고 떼쓴 기억이 없다. 티도 안나는 소심한 반항 말고는 늘 순종적인 아들이었고 믿음직스러운 첫째였다. 항상 부모의 바람대로 바르고 건강하게 커가는 것 같아서 든든했고 자랑스러웠고 그런 아들을 보고 있으면 세상에 별로 부러울 것이 없었다.
걱정스러울 때도 있었다. 초3 때인가 친한 친구들과 농구 레슨을 시켰더니 팔 힘이 어찌나 약한지 아무리 힘껏 공을 던져도 공이 골대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그래도 계속 연습하면 좋아지겠지, 미국에서 남자가 농구 못하면 친구들과 어울리기 힘들 텐데 싶어서 다시 수강 신청을 하려고 "계속할 거지?" 하고 물었더니 "엄만 내가 계속했으면 좋겠어?" 하고 물었다. "아니, 네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엄마 상관없어."라고 하자 "그럼 안 할래." 하는데 뭔가 아쉬웠다. 나는 전투적인 사커맘이 될 준비가 완벽히 되어있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남들 1년에 10cm 이상씩 팍팍 크는데 너무 키가 안 크고 왜소한 것도 걱정이었다. 성당 캠프에서 자기보다 두 살이나 어린 녀석이 때렸는데 맞서지도 않았다고 해서 충격받은 일도 있었다. 맞은 아이야말로 진짜 억울했을 텐데 아이한테 다짜고짜 "그래서 넌 가만히 있었어?"라고 화를 냈던 것 같다. 그때 그 걱정들이 얼마나 하찮았는지 지금은 나에게 걱정을 한 뭉텅이씩 던져준다 해도 괜찮으니 그저 내 곁에만 있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갑자기 떠난 아들은 내가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완전히 다른 인생을 내게 주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 상실의 슬픔에서 빠져나오는 출구를 찾지 못했다. 여전히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아들의 사진을 보며 눈물의 인사를 하고, 집 안에서 점점 아들의 체취와 흔적이 사라지는 것이 두려우며, 교복 입은 중학생들만 봐도 심장이 쿵쾅거리고, 좋은 날, 특별한 날이면 유독 아들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내 가슴을 후벼 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 더 힘을 내서 오늘을 살아내고 내일을 기대한다. 비록 내 아들은 함께 할 수 없는 오늘이고 내일이지만 그래서 나는 항상 구멍 난 가슴을 안고 살아가야 할 테지만 그 마음을 채워주는 것도 아들이기에 묵묵히 남은 생을 살아갈 뿐이다.
2021년 7월 28일 아들의 첫 번째 하늘 생일, 부디 이 엄마의 깊은 사랑과 끝없는 그리움이 하늘에 닿기를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