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에요.
나만 멈춰있는 것만 같은 날, 그런데도 더욱 격렬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 이 세상천지에 나 혼자인 것만 같이 외로운 날, 누구나 위로받고 싶은 그렇고 그런 날이 있다. 기억도 안나는 언젠가 넷플릭스에서 빨강 머리 앤 (Anne with an "E")을 만나던 날이 나에게는 그런 날이었던 것 같다. 그저 허전한 마음을 달래려고 보기 시작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나는 앤과 함께 울고 웃고 있었다. 그녀와 같이 뜨거워지고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넷플릭스 시리즈 Anne with an "E"는 2020년에 시즌 3으로 완결되었다. 내용은 원작에 충실한 듯 하지만 회차를 거듭할수록 다른 내용과 연출이 등장하기 시작하고 다소 어둡고 무거운 주제들도 많이 다루고 있다. 하지만 기본이 사랑, 우정, 꿈, 믿음 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보니 불편한 정도의 어둠은 아니다.
등장인물들은 책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이질감이 없는 완벽한 캐스팅이라 할 만한데 특히 앤은 앤 셜리가 환생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내가 상상하는 앤의 모습 그대로였다. 깡마른 주근깨 투성이 빨강머리 여자아이지만 작가가 앤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갖고 있는지 크고 작은 디테일들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름 끝에 "E"가 들어가는 앤(Anne)을 사랑해 왔다. 어릴 적 애니메이션에서부터 만화책, 동화, 성인이 되어 다시 읽은 소설, 넷플릭스 시리즈까지 단 한 번도 앤은 나를 실망시키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이런 명작 고전이 넷플릭스 시리즈로 나왔을 때 안 볼 이유가 없었다. 다만 앤의 다소 다혈질적인 성격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돌발행동을 평소에도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면 드라마를 보는 내내 거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 앤은 그저 애니메이션이나 소설 속 등장인물 이상으로 나에게 영향을 준 인물이다. 앤이 지닌 여러 가지 모습들은 어릴 적 내 선망의 대상이었고 조금 부풀려 말하자면 앤은 마치 친구처럼 나와 함께 자랐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앤은 상상력이 풍부하고 낭만적이지만 가끔은 과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평범하지 않은 추측 불가한 아이였다. 변화를 싫어하고 평범함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보통 사람들 속에서 앤은 끊임없이 실수를 저지르고 고군분투한다. 고아에 주근깨, 빨간 머리, 빼빼 마른 몸 때문에 콤플렉스에 휩싸이는 순간도 많지만 결국 누구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앤의 치명적인 매력은 끊임없는 호기심과 거침없는 상상력에 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자신의 콤플렉스나 현재 상황들을 상상으로 늘 멋지게 바꾸며 그것을 향해 성장하는 모습은 존경스러울 정도이다. 수많은 실수를 저지르면서도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도망가지 않고 솔직하게 직면해서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모습도 사랑스럽다. 그리고 자신이 의미 있게 생각하는 사람, 자연, 사물까지도 소중하게 가꾸는 모습을 보면 그토록 눈부시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그래서 앤을 보고 있으면 기운이 난다. 언제나 그랬다. 어디선가 앤이 나에게 슬플 때 슬퍼하고 기쁠 때 기뻐하라고, 소중한 모든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며 진심으로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리고 정말 앤의 절반만큼이라도 닮을 수 있다면 나의 인생이 언제나 흥미진진하고 칼라풀해질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드라마의 배경이 되었던 캐나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 꼭 가보고 싶어졌다. 앤이 살던 그린게이블스 초록지붕 집과 앤이 이름 붙인 “빛나는 호수”에서 앤에게 고마움 전하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앤처럼 되고 싶었던 덕분에 나는 꽤나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고......
혹시 넷플릭스 회원이라면 조금 울적하고 무기력한 날 빨강 머리 앤 시리즈를 볼 것을 권한다. 무한 긍정 앤의 에너지와 감탄이 절로 나는 아름다운 배경, 섬세한 고증, 소설 속 등장인물이 그대로 살아 숨 쉬는듯한 배우들의 풍성한 연기력까지 나무랄 곳이 없을뿐더러 잃어버렸던 감성까지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