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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타하리 Oct 23. 2022

2. 20대, 찌질이의 분투

40대 후반, 나를 돌아보고 진짜 나를 찾는 마지막 기회

평범한 집안에서 평범한 외모로 평범하게 자란 나는 공부도 평범했다. 사실 잘 못했다. 수학, 화학처럼 나름 나에게 재밌는 과목은 잘했으나 한번 놓친 과목은 따라잡지 못했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공부 방법을 잘 몰랐던 것 같다. 그렇게 전기대를 떨어지고 후기대를 들어간 나는 그때부터 세상의 텃세를 맛보았다. 여자들이 드문 공대, 거기에 더 여자들이 희귀한 전기공학과란 과 특성도 텃세에 한몫했다.

처음에는 선배들도, 주위 사람들도 관심이 얼떨떨했었고 나름 기분이 좋았었다. 그런데 그 관심은 좋은 관심이 아니었다. 얕보는 눈길이었다. 심지어 같은 학교 선배님들 역시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여자가 무슨 전기공학과야, 공부를 잘 못했으니 이런 곳에 왔지”

이런 말을 내 뒤에서 수근거렸다.

그때부터다, 오기가 생긴 건. ‘이렇게 살아서는 이도 저도 안 되겠구나’ 하고 진짜 공부란 걸 하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전기공학 개론부터 수업을 따라가기가 벅찼다. AC, DC(직류, 교류)를 말하는데 나는 이런 단어를 이때까지 어디서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남자 동기들은 이걸 공업 시간에 배웠단다. (나는 아마 그때 한복저고리를 만들고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혼자 공부를 시작했다. 자발적으로 공부라는 걸 한 첫 기억이 아닐까 싶다.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밤마다 허름한 우리 집 식탁에 앉아 빨간색 더블 데크 오디오에 이어폰을 꽂고 새벽 3시까지 라디오를 들으며(영화음악 방송이었다) 공업수학을 예습, 복습한다고 연습문제를 빠짐없이 풀었던 그때의 소리, 느낌, 온도가.

대학교 와서 배운 미분, 적분은 고등학교 때보다 훨씬 쉬웠고 재밌었으며 이해가 쏙쏙 되었다. 그러니 문제 풀이가 재미있었고 라디오 소리가 들리지 않는 몰입 단계로 들어가서 풀었던 그 시간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아쉽게도 지금은 그 미분 적분이 또 기억이 안 난다.)

그렇게 공부해서 장학금을 받고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자 더 이상 선배들이 무시하지 않았고, 2학년 때부터 복학하는 오빠들을 따라다니며 그 오빠들이 하는 것처럼 똑같이 학점에 신경 쓰고, 3학년 때까지 TOEIC 공부를 하고 4학년 상반기 자격증 하나 하반기 자격증 하나 땄다.

오빠들만큼 하니 나름 남들에게 떳떳한 회사에 취직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아직도 우리 대학 동기들보다는 그 복학생 오빠들과 친하게 지낸다. 그 오빠들이 나를 키웠다.




사실 취직은 쉽지 않았다. 경기도 소재 대학이라는 학교 타이들이 문제였다. 학점도 좋고, 자격증도 2개나 있고, 토익점수도 높은 나름 최상의 스펙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기업은 줄줄이 탈락했다. 나나 오빠들이나 우리를 객관적으로 봐줄 기업이 필요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다 공기업에 지원하였고 거짓말 좀 보태서 이력서 100장 쓰고(그때는 수기로) 합격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때가 나의 전성기였다.


나의 입사는 우리 회사에서도 화제였다. 신생 공기업에 기술직 여직원은 물론 없었고 공채 여직원 선배가 3명이 전부인 조직에 기술직 공채 여직원이 들어갔으니.

거기에 이력서 사진은 내가 봐도 세련되게 나왔었다. 그런데 실물을 보는 순간, 많이 실망하셨단다^^

그래도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 술 좋아하는 기술부서에 술 잘 마신다는 여직원이 들어오니 정말 6개월을 이 부서 저부서 불려 다니며 술을 얻어 마셨다.

아직도 그때 다녔던 서울역 앞 O2 호프집, 포장마차, 닭 한 마리 칼국수, 삼합집... 누구와 갔었는지도 기억이 난다. 그게 벌써 20년이 지났네.


그리고 이 회사에서 그를 만났다.

기억한다, 항상 찡그리며 일하던 선배 대리님, 손이 빠르고 일머리가 좋으며 컴퓨터를 잘 다뤄서 점심시간에 혼자 인터넷을 쓰던 선배. 말을 붙여도 항상 인상을 찡그리고 묻는 말에만 대답하던 차가운 선배, 그런데 참 잘 생겼었다.(내 눈에는)

나는 이게 문제였다. 나쁜 남자에게 끌린다. 내가 관심이 있다가도 그 상대방이 나를 좋아한다고 하면 갑자기 시시해졌다. 지금 생각하면 참 바보 같은 짓인데 만약 그때로 돌아가라고 해도 쟁취하는 연애를 하지 않을까 싶다만 그때는 그렇게 무뚝뚝한 나이도 나보다 6살이나 많은 그 선배가 참 좋았다.


“선배님, 주말에 뭐 하세요? 영화 보여주세요.”라고 해도 “나 시간 없어.”라고 무심히 대답하는 그 사람을 그렇게 쫓아다녔고 지금은 우리 애들의 아빠가 되어 있다.

아직도 무뚝뚝하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찡그린 얼굴이 많이 펴졌다.


27살, 대리가 되고 몇 개월 후 나는 결혼을 했다. 연애 때도 무뚝뚝한 그 남자에게 내 성질을 다 참아가며 받아주고 그 미친 (결혼이라는) 짓을 했다. 그리고 29살에 큰 애를 낳고, 30살에 둘째를 낳았다. 나의 전성기는 이렇게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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