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후반, 나를 돌아보고 진짜 나를 찾는 마지막 기회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마음을 가지고,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를 품고 씩씩하게 이민가방 8개를 싸들고 영국에 도착했다.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당당한 모습을 보였지만 사실
‘영어로 수업을 따라갈 수 있을까?’,
‘대학 졸업한 지 15년이 넘었는데 내가 진짜 전기공학 박사를 할 수 있을까?’라는 불안한 마음이 더 컸다.
오자마자 시작된 언어 문제는(지금도 극복하지 못했지만) 첫 번째 가장 큰 산이었다.
교수님과의 미팅은 나름 준비해 간 자료로 얼버무리면 되었지만 생활영어가 가장 문제였다.
전화 연결, 인터넷 연결, 개좌 개설, 집 계약, 차 계약. 언어 장벽 앞에서는 쉬운 게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버스에서 사는 1일권을 살 때마다 말하는 “Day saver please”도 한 번에 알아듣는 기사님이 거의 없었다.
아침마다 우리 연구실 1층 cafeteria에서 까페라떼를 사면서도 “May I get a cup of Cafe latte?”를 몇 번이나 연습한 후에 주문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이 지긋하신 아주머니는 내 발음을 항상 못 알아들었다.
사실, 이 cafeteria 아주머니는 나를 2년 이상을 봤으면서도, 내가 거의 아침마다 까페라떼를 사는 걸 알면서도 항상 “pardon?”이라고 못 알아듣는 척을 했다.
나중에는 일부러 그런 것 같다는 결론을 한국인 후배와 내렸다.
그리고 내가 공부하러 간 Birmingham은 악센트가 엄청 심한 동네였다.
‘day saver’가 ‘데이 세이버’로 발음하지 않고 ‘다이 사이버’로 발음해야 알아듣는다는 걸 시간이 지난 후 터득이 되었다.
가끔씩 ‘day saver’와 ‘cafe latte’가 한 번에 먹히는 날은 하루 종일 영어가 잘 되는 그런 신기한 경험도 했었다.
어쨌든, 영어라는 큰 산 앞에서 제일 먼저 닥친 문제는 아이들 학교였다. 오기 전 미리 시청 Birmingham교육과에 초등학교 리스트를 받아 내가 살 동네 근처 초등학교에 다 메일을 보내 놓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자리가 없다’ 거나 무응답이었다.
무작정 아침마다 걸어서 숙소 주변 4개 초등학교에 방문해 “오늘은 자리가 있냐?”라고 묻고 내가 공부하는 대학교로 갔다.
학교들이 가까운 곳도 아니었다, 초등학교 4곳 투어를 하면 2시간이 후딱 갔다. 이런 아침 루틴을 일주일 정도 한 것 같다.
‘전화를 하면 되지 왜 그렇게 직접 찾아다녔냐?’고 누가 여쭤 보신다면, 대답은 나의 영어문제 때문이었다.
전화로는 도저히 이 사람들의 발음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또, 전화를 걸 때마다 ‘내가 항상 만나는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 받으면 어쩌나, 그러면 설명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걱정에 차라리 2시간을 걷는 쪽을 택했다.
일주일 정도 그렇게 매일 아침 오니 (그나마 자리가 금방 날 것 같은) 한 학교에서
“내가 정말 자리가 생기면 이메일로, 전화로 꼭 연락을 줄 테니 더 이상 찾아오지 말라.”라는 경고를 받았다.
그래서 방문 역시 소심해졌고, ‘에이 모르겠다’ 하는 마음으로 그 학교를 믿고 기다려 보기로 했다. (영국 온 지 거의 한 달이 지난 초등학생들이 집에서 놀고 있으니 한국 엄마 마음이 얼마나 불안했겠는지 상상이 가시는지?)
그런데 다행히 정말 얼마 안 돼서 그 학교에서 메일이 왔다,
year 6, 5 두 아이 모두의 자리가 생겼으니 North Field Shopping Centre에서 우리 학교 교복을 사서 입히고 다음 주 월요일에 아이들을 데리고 오란다. 그분은 정말 약속을 지키셨고, 그날 우리는 Birmingham 시내 유일한 한국 마트인 ‘Seoul Plaza’에서 족발을 사서 파티를 했다.
이렇게 아이들도 학교를 보내고, 남편도 어학코스에 집어넣고 나니 이제 나만 잘하면 되었다.
그리고 나의 늦깎이 대학생 고군분투는 시작되었다. ‘박사 코스도 회사 일처럼 9 to 6로 하다 보면 되겠지, 한국인의 근면성을 여기서도 보여줘야지’ 하고 나름 안일하게 생각했는데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10여 년 전 회사 끝나고 다닌 산업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겨우 겨우 받은지라 그때 했던 공부는 학사 때 했던 내용보다도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입학 전 교수님과 면담했을 때 교수님께서는 박사과정을 제안하셨다.
“석사가 있는데 왜 또 석사를 하냐?”며 박사과정을 제안하셨고, 앞뒤 재지도 않고 덥석 문 내가 어리석었다.
박사과정 1년 차에는 3개월과 9개월 때 report를 제출해야 했다.
3개월 report를 작성할 때까지 매주 교수님과 미팅을 했는데 그 보고서가 써지지 않았다.
사실 아이디어만 있지 진짜 내 아이디어가 실현이 되는 아이디어 인지, 나와 비슷한 연구를 하는 논문이 있는지 찾느라 시간을 허비하느라 미팅 전날까지는 보고서 한 줄도 못쓰는 게 일상이었다.
그런데, 미팅 전날 잠이 들기 직전에 아이디어가 생각나 미팅 아침에 보고서가 써지는, 보고서 몰아 쓰기 하는 신공을 발휘했고, 나도 모르는 나의 잠재능력을 그때 발견했다.
꿈도 잘 꾸지 않는 내가 밤마다 꿈에서도 안 풀리는 부분에 대한 꿈을 꾸고, 돌아가신 아빠가 나오는 꿈도 꾸었었다.
어쨌든 이렇게 저렇게 3개월 report를 끝내고 나니 세상이 달라 보였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부담스러운 일을 해본 적이 있을까?’ 싶을 만큼 그 3개월 report는 나에게는 정말 최고의 부담이었다.
회사 돈으로 박사 공부를 하니 마음이 편할 줄 알았는데 그게 더 부담이 되었다.
차라리 자비로 공부를 하면 포기라도 하지, 이건 포기하지도 못하고 더 고역이었다.
막 들어온 터널 입구에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뒤를 돌아 들어온 곳으로 나가면 되었지만 남의 돈으로 공부하러 온 나는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콘셉트 드로잉을 그려 설명을 한 3개월 report를 제출했다.
보고서를 제출하고 나니 또 하나의 큰 산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한국 사람이 가장 어렵다는 ‘English Speaking’ 타임이었다. 교수님과 동료들 앞에서 발표를 해야 했다.
파워포인트를 만들고 시나리오를 썼다. 영국 가기 전 ‘품질 분임조 경진대회’에 참여한 게 도움이 되었다.
15분짜리 파워포인트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었다. 시나리오 작성도 문제없었다.
문제는 암기였다.
영어로 즉석에서 발표할 실력도 안 되고 외워야 했다.
등하교 시간에 버스 안에서, 길을 걸으며 읽고 또 읽었다.
그런데 (핑계긴 하지만) 40 먹은 아줌마 머리로 완벽한 암기는 무리였다.
포기하고 발음 연습에 들어갔다. 천 번은 읽었으리라.
완벽히 다 외우지는 못했지만 첫 단어는 입에서 그냥 술술 나왔다.
중간에 시나리오를 보고 읽기도 하고, 교수님들 눈을 맞추기도 해 가며 어찌어찌 15분을 채우고, 질문도 어떻게 잘 넘기고 무사히 첫 번째 관문인 3개월 Presentation을 끝냈다.
아싸, 그날만큼 신났던 적도 드물었던 것 같다.
이 이후 자신감을 좀 얻었던 것 같다.
그 이후 교수님이 추천해서 poster 논문 발표도 해봤고, 끝날 무렵에는 교수님과 공동으로 한 시간 강의도 해봤다.(지금 생각하면 아찔하다.)
이렇게 슬슬 적응을 하고 나니 아이들 term break가 시작되었다.
거기는 영국이었다, 영국 주위를 보면 갈 곳이 세고 쌨다. 그때부터 (공부 때문에 꼼짝도 못 하고 있던) 나의 방랑벽이 슬슬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그리스와 이탈리아를 찍었다. 그리고 다음 term break 방문지는 스페인, 포르투갈이었다.
그리고 여름 방학 때는 차를 가지고 33일 유럽 투어를 했다.
이때부터 우리 교수님은 나를 ‘holiday girl’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타칭 ‘holiday girl’의 남편은 1년이 지난 후 본인의 커리어를 위해 한국으로 돌아갔고, Secondary 1(중1), Primary 6(초6) 두 아이와 나는 알콩달콩 서로 의지하며 1년을 더 재미있게 살았다.
온전히 내가 남의 눈치 안 보고 내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그런 삶, 40년 만에 처음으로 살아봤다.
short term break에는 운전해서 영국 이곳저곳 캠핑장을 돌아다녔고, long term break때는 아일랜드, 크로아티아, 북유럽을 이고 지고 다녔다.
원 없이 여행하고, 원 없이 공부했던 시간이었다.
누구에게 허락을 받지 않아도 되는(아이들에게 동의는 구했지만) 자유를 그때 처음 느낀 것 같다.
그때 나는 우물 바깥세상의 물맛을 봐 버렸다. 우물이 우리나라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의 우물은 나의 부모님, 나의 남편, 즉 가정이었다.
진정한 자유로움이 뭔지 알았고, 이때부터는 가족들이 심하게 간섭을 하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깡다구가 생겼다.
‘내 인생은 내 거다’라는 자아가 이때 실현된 것 같다. (너무 늦었지만 더 늦지 않아 다행이다.)
회사의 승급 거절로 박사학위를 하다 포기하고 석사학위만 하나 더 받고 돌아오긴 했지만 무사히 석사 논문을 제출하고 2년 1개월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1년 만에 본 남편은 좀 반가웠고, 2년 만에 맛본 꼼장어는 눈물 나게 맛있었다.
‘우리나라 맥주잔이 이렇게 작았던가?’ 하며 신기해했고,
‘파리 바게뜨 케이크 값이 이렇게 비쌌어?’ 하며 놀랬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그리고 회사에 복귀하고 나는 18년 동안 해온 일과 연관이 1도 없는 해외사업이라는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