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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타하리 Oct 23. 2022

6. 너무 열심히 일해도 정 맞는 회사

40대 후반, 나를 돌아보고 진짜 나를 찾는 마지막 기회

해외 유학 후 해외사업이란 곳에 떨어졌다. ‘16년 9월 태국 사업 담당부서로 발령이 났다.

기술직 업무만 15년 해본 나에게는 정말 생소한 단어만 보였다.

영어가 영어가 아닌 것 같고 외계어라는 말이 이해가 갔다. 거기에 태국어는 진짜 외계어처럼 보이기도 했다.

PPP 사업을 한다는데 PPP가 무슨 단어의 약자인지도 몰랐고, PMC가 감리와 뭐가 다른 지도 몰랐다.

사실 선임 H 차장님과 부장님께도 물어봤지만

"넌 그것도 몰라?"라는 답변만 들었고 제대로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사실 지금 보면 그들도 정확히 몰랐다.)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 주말 이틀 내내 집 앞 커피숍에서 영문으로 번역한 200여 페이지 태국 사업 제안요청서를 하나하나 읽어가며 공부했고 주요 내용을 정리했다.

그리고 월요일 부서회의 시간에

“본 사업 개요는 이렇고, 이런 이런 조건이 들어가 있습니다, 일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은 이런 내용이고, 사업 참여를 하려면 언제까지 이런 조건에 맞는 파트너사를 찾아야 하는 게 제일 우선인 것 같습니다.”

라고 내용을 설명했더니 부장님도, 옆에 차장님도 놀라는 눈치셨다. 그리고 나는 그 회의에 낄 수 있었다.

사실 지금까지 그렇게 꼼꼼히 제안요청서를 본 사람이 없었다.

2년 동안 영어 논문만 보다 왔으니 그때는 정말 잘 읽혔다. 마지막에는 논문만 썼으니 나름 보고서도 잘 써졌다. (지금은 어디에....)

그리고 칭찬을 받으니 신이 났다. 태국 분들이 오시면 주말도 마다하지 않고 의전을 하며 다니고, 태국 출장 가서 12시까지 술 마시고 밤새 보고서 작성하고 다음날 아침 발표를 하던 날도 있었다.

정말 2개월 정도는 재미있었다. 그런데 이런 적극적인 업무가 누구에게는 마음에 안 들었었나 보다.




어느 날 회의시간에 부장님이 H 차장에게 어떤 업무를 시켰었다.

H 차장은 “그 기한까지는 그 일을 못 끝낸다. 그리고 내가 봤을 때는 필요 없는 일이다. 안 해도 되는 일을 왜 시키냐” 하고 따졌고 언성이 높아졌다.

옆에서 보다 못한 (부서 신입인) 나는 그럼 내가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H 차장에게 불려 갔다. 그리고 이런 말을 들었다.

“내가 못하겠다는 일을 조 과장이 그렇게 한다고 하면 내가 뭐가 되느냐? 다음부터 그러지 말아라.”

 ‘음. 이런 것도 남에겐 피해가 될 수 있구나’ 하고 이해는 했지만 ‘나는 나중에 저런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란 생각도 했다.


또 당장 처리해야 하는 업무 외에도 수시로 사업 발주계획을 서칭 하고, 자료를 찾으면 보고서를 작성해 부장님께 보고를 드렸다.

처음에는 그렇게 좋아하시던 부장님이 “언제 내가 조 과장한테 이런 일을 시켰어? 내가 시키는 일이나 제대로 해!”하고 화를 내시고,  나보다 우리 부서에 늦게 합류한 K과장(남자 동기)에게 업무를 주기 시작하고, 둘이 출장을 가고 나는 갑자기 지원업무로 빠지게 되었다.

한 번은 그 둘이 사업 참여를 위해 파트너사와 참여조건 협상을 하러 태국으로 출장을 가놓고 나에게 Line으로 연락해 파트너사에게 조건을 제시하란다.

옆방에 그 파트너사 담당자가 있는 거 다 알고 있는데 만나지도 않고 한국에 있는 나에게 그 조건을 말하란다. 어이가 없었다.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었다. 아침 일찍 입찰서류를 공증하고, 대전에서 서울에 있는 태국대사관에 가서 아포스티유를 신청해야 하는 일이 벌어졌다, 제출기한이 촉박해서 스케줄이 그렇게 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은 대전에 폭설이 내린 날이었다. 눈이 많이 와서 운전하기 힘들었지만 꾸역꾸역 8시에 문 여는 영어 공증사무소에 가서 사무소에 서류를 제출하고 순번을 받아 서류가 공증사에게 가는 걸 확인하고 나와서 식당에서 해장국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 시간에 그 사람들은 (골프장에서) 놀고 있었단다.(나중에 동기가 출장을 갔다 와서 미안하다고 하소연을 했다).

그 둘은 결국 협상을 제대로 못하고 돌아왔고, 그 사업은 참가도 못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리고 K부장은 그때부터 나와 대화도 잘 안 하기 시작했다. ‘참 이 사람 밑에서는 감정 소모만 하다 끝내겠구나, 더 이상 이 사람에게 배울 게 없구나’라는 걸 느꼈다. 이 기간이 채 4개월이 되지 않았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늦게까지 야근을 하고 있는데, 옆 부서 껄렁껄렁한 P부장님께서 또 말을 붙여오셨다.

“태국 사업은 아직 멀었어, 인도네시아로 와!”

내 자리는 프린트 옆자리였는데 P부장님은 프린트물을 찾으러 올 때마다 내게 툭툭 그런 말을 던지셨다. 그날도 그런 날 중 하나였다.

예전에는 “아니에요, 태국 고속철도 사업 꼭 수주할 거예요.” 하고 대거리를 하고 씩씩거렸었다. 태국 사업에 애정이 많았을 때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그리고 수주한 사업에 당장 투입할 전기기술자가 없어서 내게 진지하게 말씀하신 적도 있었다. 물론 나는 거절을 했었다.

그래도 P 부장님은 수시로 내게, 프린터에 올 때마다 툭 던지셨다. 그분에게는 심각한 시도는 아니었겠지만 내가 달라졌다. “저 인도네시아 사업할래요.”

P부장님은 처음에는 좀 당황하시며 “진짜? 가능해?”

“네, 제가 필요한 곳으로 갈래요.”

P부장님은 “알겠다, 내일 아침 본부장과 말해보겠다.” 하셨다.


다음날 아침 K부장은 씩씩거리며 본부장실을 나왔고, 나는 뭐 좀 죄송했지만 모르는 척하고 있다, P부장님께서 자리를 옮기라고 하셔서 동기에게 다 업무를 넘기고 옆 부서에 자리를 잡고 일주일 후 2개월 인도네시아 장기 출장을 갔다.

(여담이지만 내가 있던 태국 부서는 동기 말고 여자 과장이 한 분 더 계셨는데 내가 가고 나니 그 언니를 또 왕따를 시켜서 그 언니도 못 버티고 다른 부서로 가고 결국 내 동기와 그 부장만 남았었다.(H 차장은 그전에 벌써 인도네시아 사업으로 투입되었다.)

그리고 무던한 남자 동기도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 육아휴직을 써버렸고, 그 이후 그 부서는 사원 한 명을 받아서 겨우 버티고 있다 부서가 없어져 K부장은 다른 곳으로 발령을 받으셨고, 1년 후 명예퇴직을 하시고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시는지 알 수가 없다.)


2017년 1월 6일, 나의 진짜 해외사업은 그때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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