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영화 1

20250702

by 고요

좋아하는 것 자체는 실망시키지 않는다.


20대 초부터, 영화관에서 4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영화를 매우 좋아해서,라고 흔히들 면접에서 말하는 뻔한 이유가 나에게는 진짜였고 정말로 영화가 좋아서 영화관에서 일을 했다. 영화관마다 조금씩의 차이점은 있겠지만 내가 일했던 영화관은 한 달에 10편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게 해 주었고(제일 중요) 팝콘이나 탄산음료 같은 스낵들을 50% 정도 할인해 주었다. 한 달에 열 편을 가득 채워서 보는 건 같이 일하는 사람들 중에 내가 거의 유일할 정도로 흔한 일은 아니었다. 같은 영화를 두 번 세 번 보기도 하고, 그 시절에는 재미없어도 중간에 나오면 그만이니 일단 봐 보자는 생각으로 무턱대고 뺀질나게 상영관 문턱을 드나들었다. 그렇게 영화를 보는 것에 제약이 없으니 갈 곳이 없을 때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곳이 영화관이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영화를 보러 갔고, 혼자 밥 먹기 싫을 때도 크리미갈릭핫도그와 포도환타를 사들고 영화를 보러 갔으며, 학원 시간이 조금 어중간하게 남았을 때 역시 영화를 보다 수업을 들으러 갔다. 그렇게 수없이 봐왔던 영화들이 어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그 순간들이 매우 좋았고 그거면 충분했다.


그렇게 지겹도록 영화를 보러 갔던 곳엔 언제나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일하는 지점엔 늘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 명 이상은 꼭 있었기에 그와 일 얘기, 영화 얘기, 오늘 있었던 일 얘기를 끊임없이 했다. 일하지 않는 다른 지점에 가도 그들이 늘 반갑고 안쓰럽고 그랬다. 불친절한 아르바이트생이 있으면 그 사람의 하루에 어떠한 모난 일이 있었을지 궁금했고, 유독 친절한 사람이 있으면 나도 덩달아 다정해졌다.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모르지만 동질감을 느끼는 이들을 열심히 구경하다 보면 늘 영화 앞부분을 놓치기 일쑤였지만, 상관없었다. 이미 나에게 영화의 시작은 그들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사실 영화관에서 일을 하면 영화의 앞부분과 끝부분은 지겹게 많이 보게 된다.) 그전까지는 영화만을 사랑했다면 일하는 동안 영화와 영화관 둘 다를 격하게 사랑하게 되었으니 제목을 '아무튼, 영화관'이라고 짓는대도 할 말이 없다.


이런 내게 영화를 좋아하는 건 정말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영화는 혼란했던 내 삶에 위안을 주었던 유일한 것이었기 때문에. 남들과 같은 길을 가고 싶지 않던 내게 조금은 돌아가도 괜찮다고 말해준 것도, 세상은 원래 자주 불친절하다고 이야기해 준 것도, 깊은 자책감과 낮아진 자존감에 갇혀 어쩔 줄 몰라하던 나를 통째로 새로운 장소에 옮겨다 준 것도, 여러 이들과의 관계에 지쳐 포기하고 싶었을 때 돌파구를 찾게 끌어준 것도 모두 그것이었다. 영화를 사랑하지 않고 어떻게 배길 수 있을까. 그렇게 사랑하는 영화 예매 사이트를 들여다보는 게 어느덧 일상이 되어버린 터, 어느 날 고객 등급 확인을 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한 글귀에 눈이 머물렀다.

'이 짧은 순간의 제목은 행복이에요.'

와, 어찌 보면 별 말이 아닐 수도 있겠는데 엄청난 감동을 받아버리고 마는 이유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상영시간 동안 나는 분명히 행복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를 보러 가는 동안 줄거리를 조금 찾아보거나 등장인물을 궁금해하기도 하고, 한가하거나 바쁜 일하는 사람들을 지나쳐, 왁자지껄하면서도 잔잔한 광고로 시간을 때우다 상영관이 암전 될 때의 설렘은 영화관에 처음 갔을 때부터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영화관이라는 장소를 접한 지 얼마 안 된 처음엔 '어떡해! 시작한다!' 하며 작게 호들갑을 떨었다면, 지금은 내적 호들갑으로 여전히 설렘을 느낀다. 영화를 보는 내내 눈앞을 가득 채우는 스크린과 쿵쾅대며 울리는 음향에 온 감각과 마음을 빼앗기고 또다시 불이 탁! 켜졌을 때 잔잔하게 남는 여운의 분위기도 모두 영화관에서 감상할 수 있는 영화의 특권이자 일종이며, 집에 돌아가는 길 영화에 나왔던 특히 좋았던 노래를 찾아들으며 창밖을 바라보면 그 순간 내가 영화 주인공이 된 것만 같은 기분 역시 모두 나를 행복하게 하는 요소들이다. 진짜로 사랑하지 않고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영화관 아르바이트를 관두고 다른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갔을 때 면접관의 질문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좋아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면 분명 그게 더는 좋아지지 않을 수도 있고 실망하게 될 수도 있는데 그럴 땐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 대답은 영화관에 있는 내내 뼈저리게 느꼈으니 아주 쉬운 질문이었다. "좋아하는 것 자체는 저를 실망시키지 않던데요. 오히려 저를 힘들게 하는 건 늘 사람 쪽이었어요. 좋은 사람들과 함께 좋아하는 것을 업으로 삼을 수 있다면 그거보다 더 바랄 게 있을까요." 웩 소리가 나올지도 모르지만 난 정말로 그렇게 대답했고 그것이 사실이었다. 면접 보는 내내 좋은 사람들만 가득하다고 자부하던 그 회사에서도 나를 떨어뜨릴 이유가 당연히 없었다.


이건 말하기 좀 쑥스러운 일이긴 한데, 사실 영화를 보러 가면 열에 일곱 번 정도는 잠을 잔다. 영화가 지루해서도 아니고 전날 과로를 해서도 아닌데 영화관만 가면 그렇게 잠이 쏟아진다. 한 달에 영화를 평균 예닐곱 편씩 보던 때에는 내돈내영(내 돈으로 내가 영화 보기)이 아니라서 그런가 싶기도 했지만 일을 관두고 피 같은 내 돈을 주고 볼 때도 어김없이 꾸벅거리는 나를 마주하게 된다. 몇 년을 꼬박 기다려 개봉한 시리즈의 마지막 영화를 볼 때나, 썸을 타던 사람과 처음으로 단둘이 영화를 볼 때도 잠을 잤으니 말 다했지. 영화를 사랑한다고 외쳐대며 글까지 쓰고 있는 내가 이래도 되는 건가 자괴감이 들긴 하지만, 이 미스터리 한 일은 공기가 충분치 않은 곳에서는 뇌가 잠을 선택하는 것 같다고 어림짐작만 할 뿐이다. 비행기에서도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잠만 자니 영 틀린 의견은 아닌 것 같다. 전지적 스크린 시점에서 잦은 빈도로 헤드뱅잉을 하는 나를 보며 실망하지를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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