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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진 Dec 08. 2020

마지막은 인사가 없다.

그놈이 인사를 하지 않는 이유


마지막은 인사가 없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알려주면 좋으련만 그런 친절함 따윈 기대할 수 없다. 늘 아무 말 없이 찾아와서 사람의 마음을 후벼 파고 떠나간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걸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지부진한 연애가 이어지는 것보다 확실히 차이는 편이 결국 더 나은 것처럼, 이제 널 차 버릴 거라고 알려줬으면 좋겠다. 최소한의 준비라도 해보게. 조금 덜 다쳐보게.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놈은 불친절하다. 일을 할 때도 사람을 만날 때도, 무언가 흠뻑 빠진 대상이 있어도 예외가 없다. 이제 조금 할만한데... 이제 재미 좀 붙여봤는데... 하는 순간 어김없이 다시 찾아온다. 그리고 슬며시 경종을 울리고 떠나간다.


늘 후회했다. '그것이 마지막이라는 걸 알았더라면, 그랬다면 더 열심히 했을 텐데... 적어도 그때처럼 하지는 않았을 텐데, 무언가 더 해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러면서 원망했다. 끈덕지게 쫓아오는 저 놈을 미워했다. 또 언제 소리 소문 없이 찾아올지 모르니 경계하며 살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다. 늘 인사 없이 떠나던 녀석이 이번엔 미리 언질을 주었다. 갑자기 친절해진 녀석이 무서웠다. 늘 끝은 있기 마련이지만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컸기에 현실로 다가오니 공포감이 생겼다. 미리 알게 되니 더 괴로웠다. 녀석은 이것이 제법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같이 성장해온 사람들과의 마지막 미션임을 무섭게 알려주고 있었다. 아니, 알려준다기보다 경고하는 것 같았다.


마지막을 알고 있으면 뭔가 많이 다를 줄 알았다. 분명 아주 특별한 무언가를 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였다. 수많은 생각이 돌고 돌아 미치는 곳은 결국 제자리였다. 평소대로, 그냥 평소 하던 대로 하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 평소가 잘 되지 않았다. 그걸 의식하다 보니 영향을 주었다. 조금 더 욕심을 내고 쓸데없는 감상에 취했다. 그러다 보니 실수가 나왔다.


인사 안 하던 놈이 인사를 하고 나니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그 녀석이 왜 인사를 안 하는 것이지. 친절했다간 괜히 쓸데없는 공포를 심어주고, 지레 겁을 먹고, 과욕을 부려 하지 않아도 될 실수를 하는 장면을 많이 봐온 모양이다. 수많은 경험으로 최선의 것을 찾아내서 그런 것인데 왜 그토록 미워했을까. 다 나를 위해 그런 것이었는데.




5년도 넘게 내 영혼을 갈아 넣은 일이 끝났다. 함께 해온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던 날. 만나기 전부터 주제는 정해져 있었다. 우리의 마지막에 흠뻑 취해보자는 것, 그것 외에 더 거창한 무언가가 필요치 않았다. 쓸데없이 반복되는 옛날이야기가 그날만큼은 아주 특별했다. 마지막이라는 특별한 안주가 주는 술자리는 정성이 깃든 선물이나 심금을 울리는 한마디 없이도 그 시간 자체로 세상 어디에도 없는 멋들어진 인사를 하고 있었다.


일의 끝을 알려주는 인사는 무섭고 버거웠다. 하지만 사람과의 마지막 인사는 한없이 따뜻했다. 그저 이 한 번의 자리가 더 있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위로와 위안이 되었다. 헤어질 때도 우리는 특별한 인사가 없었다. 매번 그랬던 것처럼, 또 다음 주면 만날 것처럼 완전히 똑같이 집으로 흩어졌다.


집에 돌아오니 해답이 모호해졌다.

이 녀석... 분명 또 찾아올 텐데...


인사를 해? 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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