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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리 Apr 11. 2020

누구나 귀여워지는

오 나의 목도리여


추위를 막기 위하여 목에 두르는 물건(표준국어대사전). 혹은 추위를 막거나 멋을 내기 위하여 목에 두르는 의류 용품(고려대한국어대사전). 사전적 의미의 목도리이다. 나는 목도리를 좋아한다. ‘겨울의 물건’ 하면 1.5초 만에 목도리가 떠오를 정도로.

2019년 11월 24일 현재, 옷장에는 10개의 목도리가 있다. 목도리를 10개 가진 만큼 좋아하는 셈이다. 50개를 가진 사람보다는 덜 좋아하고, 2개를 가진 사람보다는 더 좋아한다고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경제적 제약을 이유로 마음이 설렜지만 결국 소유권을 취득하지는 못하고 흘려보낼 수밖에 없었던 인연들, 그리고 보관 공간의 한계로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눈물을 머금고 의류함과 아름다운 가게로 떠나보내야 했던 것을 다 합치면 50개 정도는 될 수도 있겠다(왜인지 이 글을 쓸 자격이 생긴 것 같다). 이렇게 세상에 어여쁜 목도리가 많은데 목이 한 개뿐이라니, 아쉬울 따름이다.

엄지로 살갗을 밀면 때가 나올 만큼 푹푹 찌는 8월 초에 태어나서일까? 나는 주위 사람 중에서 가장 추위를 많이 탄다. 가족 중에서나, 사무실에서나 가장 먼저 겨울을 맞이하는 사람도, 가장 나중에 겨울을 떠나보내는 사람도 나다. 내 자리에는 겨우내 전기방석과 발난로와 담요와 카디건이 놓여 있으며, 침대에 깔린 온수매트는 11월부터 4월까지 오장육부 수준으로 생존에 필요한 물건이 된다. 그렇다 보니 목도리를 좋아하는 이유 중 단연 첫 번째는 ‘방한’이겠다. 특히 이불같이 폭이 넓고 긴 목도리를 선호한다. 춥지만 멋을 부리고 싶어 큰마음먹고 코트를 입는 날에도 오겹살처럼 두툼하게 목에 두 번씩 둘둘 감아놓으면 어깨까지 폭닥하게 덮어 체온을 지켜주니 든든하다.

목도리는 방한의 기능만 가진 것이 아니다. 겨울 패션 아이템의 역할도 톡톡히 한다. 날이 추워지면 추워질수록 외투는 검정색 롱패딩 한 가지로 통일되곤 하는데, 추위를 탈수록 더 걸어 다니는 김밥 패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럴 때 알록달록한 목도리를 딱~ 해주면 나의 모습이 흑백사진에서 컬러 TV로 바뀐단 말씀! 다 똑같은 검정 김밥들 사이에서 양두리 김밥이 누구인지 표시해주니 이름표가 되기도 한다.

또 목도리는 가끔 피신처가 되어 나를 안아준다. 울적하고 슬프고 화가 나고 짜증 나서 “혼자 있고 싶으니 다들 이 세상에서 로그아웃해 주세요”라고 하고 싶은 날. 웃는 얼굴 모양의 가면을 쓰기 버거워 무표정을 드러내 버리고 싶은, 온전히 나로 있고 싶은 순간. 목도리를 눈 아래까지 세우면 0.1평만 한 나만의 방이 생긴다. 여기에 따뜻한 음악을 귓가에 흘려 넣으면 마치 누군가가 나를 안고 “오늘 많이 힘들었지? 그래그래 다 알아”라고 토닥토닥 위로해주는 기분이 든다. 눈가가 촉촉해질 때에는 잠시 눈 위까지 올려도 좋다. 그대로 꾸욱 누르면 눈물도 닦아준다.

목도리는 사람들의 사랑스러움을 꺼내어 보여주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나는 우리 모두에게 각자의 귀여움이 있다고 생각한다. “저는 전혀 귀엽지 않은데요?”라고 해도, 스스로 자각하지 못할 뿐 당신의 경추 3번 안쪽 척수 어디에 귀여움이 파묻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영하권으로 떨어져 추운 날, 약속의 상대방이 저 멀리서 어깨를 움츠린 채 목도리에 얼굴의 1/3 가량을 파묻고 발그스레한 볼에 입김을 내뿜으며 다가오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키와 나이, 성별, 국적, 종교와 상관없이, 183cm에 95kg의 거구도, 58 개띠 62살 할아저씨도 귀여워진다. 모두가 귀여워지는 물건이라니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밖에도 목도리는 담요와 안대, 이불, 우산, 걸레1) 대용으로도 쓸 수 있다. 이렇게 순기능이 많은 목도리. 좋아할 수밖에 없다. 이 정도 썼으면 한국목도리협회 같은 곳에 글이라도 넣어볼까 싶은데 아쉽게도 그런 단체는 아직 없다. 이참에 내가 한번...?

1) 작년 12월 끝 무렵, 회사 인턴이 보드카를 소주처럼 마시다가 인사불성이 되어 자기 집 앞에 여기저기 토를 했던 적이 있다. 그를 데려다주러 갔지만 그대로 놔두기엔 토사물이 얼어 빙판이 될 지경이었다. 결국 그의 목도리는 걸레로 바닥 청소에 사용된 후 생을 마감했다(이미 토사물 범벅이기도 했다). 우리 모두 연말연시 술은 적당히, 목도리는 소중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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