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 플라워와 함께
아이와 제주도에 3일을 있었는데, 관광지에서 멋지게 잘 나온 사진 한 장이 없다. 아침에 일어나서 조식 먹으면서 오전 일정 고민하다가 씻기고 로션 발라주고 옷 입히고. 아,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6살 남자아이는 옷 입을 때 그렇게 도망을 다닌다. 운전해서 목적지에 도착하면 관광하면서 점심 먹을 곳을 알아보고 점심 먹으면서 오후 계획을 생각해야 하며, 오후 일정 소화하다 보면 저녁 먹을 데를 알아봐야 하고... 무슨 거창한 깃발 여행이나 미슐랭 식도락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지만 나는 여행 내내 무언가를 알아보느라 허둥지둥 댔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관광지 정보와 맛집 리스트를 미리 준비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아이와의 여행을 기록하면서 지금까지 보태지 않은 감정이 있다. 아빠로서가 아닌, 나 자신으로서 여행에 대한 감정 말이다. 부자지간의 관계 개선, 정서적 교감 등 이번 여행의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이야기를 걷어내자면, 나 자신의 여행 만족도는 매우 낮았다. 나는 유유자적한 식도락 여행 스타일을 선호하는데 이번 여행은 유유자적하지도 않으며, 아이 입맛이 우선이라서 식도락 여행도 할 수가 없었다. 아이와의 메뉴는 고기국수, 고등어구이, 돈가스 등이며, 어떤 때는 컵라면을 먹기도 했다. 또한, 나는 관광지에 있기만 했을 뿐, 관광을 할 수는 없었다. 대부분의 시선은 아이에게, 아이가 아니라면 아이를 담고 있는 카메라 렌즈를 보고 있었다. 멜젓을 듬뿍 찍은 오겹살 한 점과 소주 한잔하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4일 차 아침, 아들과 나는 기지개를 켜자마자 하이파이브를 하고 웃었다. 오늘 드디어 와이프가 제주도에 오기로 때문이다. 우리는 보고 싶었던 마음을 담아 그녀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고, 회의 끝에 공항에서 웰컴 플라워를 준비하기로 했다. 우리는 유채꽃 한 다발을 구해와 그녀를 오랜만에 만나서 얼마나 좋은지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꽃 손질을 했다. 그리고는 작은 생수병의 라벨을 떼어 내고 물을 채운 뒤 투박하게 다듬어진 꽃을 꽂았다.
아이는 공항 출구 앞에서 화병을 들고서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전광판에는 그녀가 타고 온 비행기 편명 옆에 'Arrival'이라는 표시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마치 동남아의 여행 가이드가 된 것처럼 게이트 앞에서 당장이라도 환영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게이트가 열릴 때마다 달려 나갈 포즈를 취하다가 다시 숨을 고르기를 십 수 번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환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화동이 화병을 들고 그녀에게 달려가서 안겼고, 나보다 그녀가 먼저 눈시울이 붉어졌다. 우리는 3박 4일의 시간 동안에 각자 새로운 경험들로 감정의 기복을 버텨내면서 담금질을 해왔다. 아들과 나는 그녀가 없이 단 둘이만 있을 때 서로가 서로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암묵적인 규칙이 생겼고, 그녀 또한 아들, 남편과 떨어져 있는 시간을 경험함으로써 본인의 역할에 대한 재정의가 있었을 것이다. 3박 4일은 긴 시간이었지만, 새로운 경험과 감정을 받아들여 온전히 소화하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우리 셋의 관계는 제주도에 오기 전과는 미묘하게 달라졌다. 서로에게 더욱 독립적이면서, 서로가 간절해지는 방향으로.
그녀가 도착하면서 여행의 판도가 달라졌다. 나는 그녀를 태워 곧바로 숙소가 아닌 흑돼지 집으로 향했다.
관광과 소비 그리고 식욕의 봉인을 그녀가 해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