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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선이 Aug 20. 2024

상담을 시작하고 알게 된 것들

덜 정돈된 잡담

   8월 1일,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누군가 내 얘기를 판단하지 않고 들어준다는 것만으로도 위로와 응원을 받는 느낌이었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내 괴로움이 무엇으로 구성되어있는지 더 높은 해상도로 볼 수 있게 된 것 같다.


    상담을 받기 전에도 무기력과 괴로움의 이유를 찾기 위해 나름 필사적인 노력을 했다. 생명이 유한하다는 사실에 허무함을 느껴서 그런 건지 고민해보기도 했고, 단순히 게으름에 빠져서 - 한편으로는 게으름을 즐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게을러도 되는지 불안하고 초조해하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이거다' 싶은 게 없었다. 생명이 유한하다는 사실이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것만으로 이렇게 괴로운 게 납득되지 않았다. 스스로 게으르다고 생각했던 순간들이 즐겁거나 행복하지도 않았다. 뭘 할 의지, 동기, 기력을 발휘할 수가 없어서 괴로운데 이게 게으름이 맞나? 괴로움의 원인을 찾고 싶고 해방되고 자유로워지고 싶은데 방법을 찾을 수가 없어서 외면하고 회피하려던 순간들을 게으름이라고 자책했던 건 아닌가?


    그러다 혼자 설거지를 하며 틀어놓은 노래를 듣고 난데 없이 오열을 했다. 가수가 누구였고 어떤 노래였는지 기억이 나진 않는다. 다만 그 사람과 노래가 너무 불안하고 위태롭게 들렸다. 그 순간 내 자신도 위태롭고 불안하게 느껴졌고 '뭔가 잘못 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계속 울었다. 그러고 나자 정말로 상담을 받아봐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그동안 별의 별 핑계를 대며 미루기만 한 상담이었다. 


   그 이후로 나에게 집중하고 문제에 직면하는 시간을 더 자주, 길게 가졌다. 이 글쓰기도 그 일환이다. 글을 쓰면 머리 속을 부유하며 뒤죽박죽 엉켜있던 주제, 생각, 개념들을 차곡차곡 정리하고 정돈할 수 있다. 수납 위치를 바꾸기도 하고, A라서 B라고 생각했던 관계를 B라서 A라는 식으로 수정하기도 한다.


    어릴 때의 나는 '자의식이 과한 아이'였다. 일상 속에서 때때로 부정직하고 파렴치했으면서도 꿈은 또래 답지 않게 거시적이고 정의로웠다. 문방구에서 비누방울을 훔치던 나와 대통령이 되고 싶었던 내가 공존했다. 정치를 하고 싶어하면서도 부모님에게 거짓말을 곧잘 했다. 부조리나 불평등을 없애고 차별 받는 약자가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하면서도 '애자'나 '병신'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살기도 했다. 스스로를 성찰하기보다는 막연히 정의롭고 선한 세상을 만들고 싶어하던 모지리라고 요약하고 싶다.


    또래에 비해 특이한 꿈을 가진 데에는 아빠의 영향이 컸다. 대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민주화 운동, 노동 운동만 하면서 살아 온 아빠는 그 시절 나의 영웅이었다. 안기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세상의 부와 권력에 거리를 두면서도 평생을 당신이 추구하는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노력하는 아빠의 모습이 멋지고 대단해보였다. 특히 아빠는 '민중'을 사랑했던 것 같다. 그 중에서도 노동자라는 집단을 특히 사랑했던 것 같다. 그게 나에게도 영향을 줘서, 나는 인간 집단은 대체로 선하고 가치 있는 존재라고 믿었다.


    하지만 서른일곱이 된 지금, 나는 너무 변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예전 만큼의 인간에 대한 신뢰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동안 찌질한 인간을 너무 많이 봤다. 찌질한 인간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고집 불통이었다. 사실을 왜곡했고 타인에게 악의적이었으며 자신을 피해자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본인이 가해자였던 순간은 애써 부정했다. 공교로운건 그들 대부분이 남자였다는 점이다.


    나는 '페미니즘'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남성들이 정의하는 것과는 별개로 나는 페미니즘을 이렇게* 정의한다. 


*구성된 것들을 본질적인 것이라고 왜곡함으로서 발생해 온 인간관, 세계관, 가치관의 오류 - 이것으로 인한 부조리한 차별과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접근 방식, 그리고 이와 관련된 인식 체계와 문화 및 저항 일체.


    한국 남성 주류는 페미니즘을 여성우월주의, 남성혐오주의, 남성이 받는 역차별의 원인이 되는 사상 등으로 정의한다는 점에서 나와 거리가 있다. 내 관점에서 이들의 가치관을 거칠게 요약하면 '안티-페미니즘'이다.


    이들은 SNS와 커뮤니티라는 온라인 환경을 통해 자신들도 모른 채 결집하고 동기화한다. 첫 단추는 알고리즘이다. 그들은 비슷한 주장을 하는 게시물과 영상, 댓글에 자연스럽게 모여든다. 다음 단계는 동기화와 자기 확신이다. 나와 비슷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상호 학습하며 자신들의 성향을 강화한다. 그리고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다'는 것을 재확인하고 무의식 중에 서로에게 의지함으로서 자기 확신에 빠져든다. 이 과정은 직선적이기보다는 순환적이라서 반복하며 심화된다.


    나는 이 사람들이 바뀌지 않으면 '출산율'이나 '젠더 갈등'이라고 불리는 문제들이 결코 해결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여성이라는 성별을 근거로 가해지는 차별과 피해가 엄존하는 현실에서 여성들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하지만 남성들은 이런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경험하는 부조리와 불평등 뿐만 아니라 불편과 불안까지 '남성이라서 경험하는 역차별'이라는 프레임에 욱여넣는다. 그 중 실제로 '남성이라서 겪는 부조리'에 해당하는 건 드물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비슷한 문제를 성별과 무관하게 또래의 여성들도 겪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남성들이 겪고 있는 문제의 원인은 '성차별'이 아니다. 성에 근거하지 않은 차별이라도 그걸 겪는 주체가 남성일 경우에는 '남성이 겪는 역차별'로 둔갑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남성들이 그것을 믿어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적 갈등이 해소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연애를 하고 싶지도 않고 아이를 낳고 싶지도 않다. '성차별'이 아닌 다른 사회적 갈등도 마찬가지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가 자의적이고 불분명하다. 그 선을 다시 긋기 위해서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지만 아무도 그게 가능할 거라고 믿지 못한다. 서로에 대한 불신이 너무 깊다.


    이런 현실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냐고 묻는다면 각자의 입장에 따라 수많은 대답이 나올 거다. 그 중에서 나의 대답은 감히 남성을 향한다. 연애를 하지 않고, 결혼을 하지 않고, 출산을 하지 않는 것이 남성과 여성의 공동 책임이라고 볼 수가 없다. 남성이 아닌 성별은 예전부터 차별을 받아 왔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여성이고 그 외에도 많은 소수의 성들이 있다. 당연히 남성의 삶도 좋기만 한 게 아니다. 거기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다. 삶 자체가 지닌 근본적인 괴로움부터 시작해서 재산의 차이, 외모와 키 등 신체적인 차이 등 여러 이유로 서로가 가진 권력에 차등이 생기게 된다. 하지만 그것들은 여성과 성소수자가 경험하는 차별과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남성이 괴롭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남성이 다른 성에 비해 차별을 받아서 생기는 괴로움'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 사실을 부정하는 남성들의 믿음이 확고해질수록 문제를 해결할 여지도 없어진다. 애초에 문제를 직면할 가능성이 사라진다. 스스로 돈도 없고 노후도 불안하고 삶도 행복하지 않다는 남성들에게 '그래도 당신이 남성이라서 누려온 것들이 있으며 다른 성별을 가졌다면 그마저도 누리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SNS나 커뮤니티 환경이 그 어려움을 증폭시킨다.


    이성애자 여성들은 자연스럽게 연애나 결혼을 포기하게 된다. 아니, 연애나 결혼을 할 수 있을 만큼 가치관 차이가 크지 않은 남성을 찾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이성애나 남성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한국 여성들을 비난하기도 하고 다른 나라 여성을 만나겠다고 하기도 하고 알파 메일이 되어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도 한다.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연애를 '안' 하겠다고 선포하기도 하는데 사실은 '못'하는 측면이 더 클 수도 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데 여성들이 연애에 대한 희망을 접은 상태에서 남성 혼자서 뭘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자주 뉴스와 댓글창을 장식하는 '출산율'이나 '젠더 갈등'이라는 것들이 주로 남성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근데 지금도 앞으로도 남성들이 이렇게 생각하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남성들이 SNS와 커뮤니티를 통해 동질적으로 강화되는 환경이 바뀌지 않는 이상 새로운 의견을 접하고 자신들을 비판적으로 사고할 가능성이 전혀 그려지지 않는다. 


    누군가 세상이 나빠질 것 같냐 좋아질 것 같냐고 묻는다면 나는 나빠질 것 같다고 대답한다. 어릴 때와는 정반대다. 나처럼 남성을 비판하는 남성은 설 자리를 잃고 목소리도 약해질 것이다. 대다수의 남성들은 서로를 더 닮아갈 것이다. 이들은 뭉쳐서 더 큰 소리를 낼 것이고 세상은 이들의 눈치를 볼 것이다. 결국 남자들은 자존심을 지키는 대신 다른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나를 힘들게 한다. 무언가를 할 의욕을 빼았는다. 내가 왜 이렇게 생겨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겐 세상이 어떻게 되느냐가 너무 중요하다. 나는 거기서 동력과 에너지를 얻는다. 근데 지금은 세상에 대한 회의와 불신에 차 있으니 우울하고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이게 지금까지 정리한 내 상황이다. 고작 이런 정리를 하는 데 몇년이 걸렸다. 예전에는 내가 찌질한 남성성을 싫어하는 줄만 알았다. 그게 이렇게 큰 짐이 되어 나를 누르고 있는 줄은 몰랐다.


    이 문제를 당장 해결할 방법은 모르겠다. 다만 마음이 편하려면 내 꿈이 실현 가능한지를 떠나서 일상에서도, 일에서도 내 꿈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반영하기를 피하지 않아야 할 것 같다. (물론 거시적인 세상사에 과하게 영향을 받으면서 자아 성찰은 그만큼 성숙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직면하는 것도 필요할 거다.) 


    하지만 막상 그러자니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한두개가 아니다. 당장 하고 있는 일,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내 안의 두려움과 걱정까지 많은 것들이 결정을 주저하게 만든다. 방향을 정하는 건 간단하지만 그걸 실행하는 건 첩첩산중이다.


    나는 지금까지 뭐든 직관적으로 쉽게 결정을 하고, 결정을 한 뒤에는 과할 정도로 빠르게 실행하고 몰두하는 성향을 보여왔다. 지금처럼 첫 단추에 해당하는 '결정'을 못 해서 괴로워 한 적은 없었다. 결국 이 한 걸음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 고민과 주저함을 해소하고 어떤 방향으로든 결정을 하기까지의 한 걸음 말이다.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는데 몇년이 걸렸으니 앞으로 또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게 며칠이 될지 몇년이 될지 생각하는 건 부질 없는 일이다. 얼마가 걸리든 각오를 단단히 하고 꿋꿋이 걸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지금 내가 가질 수 있는 각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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