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지금도 조용히 시작되고 있다.
시작은 한 점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있던 자리를 밀어내며 서서히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일이다. 움직임이 미세할수록 흔적은 오래 남고, 그 잔상은 단정하게 정리된 표면 아래에서 은근히 번진다.
전시를 준비하며 떠오른 이야기는 선형적인 완결된 줄이 아니라 잘려나간 면이다. 덩어리로 이어지는 서사가 아니라, 겹겹이 벌어진 파편들—서로 맞닿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하는 단면들이다. 생각은 이미지의 얼굴로 다가오고, 이미지는 그 생각을 대신해 우리의 시야에 들어온다. 머릿속에는 문장이 아니라 장면들이 펼쳐지고, 그 장면들은 말보다 더 조용하게 말을 건넨다.
이 전시는 그런 장면들을 곳곳에 심어두는 일이다. 관객은 그 점들을 좇아가도 좋고, 각기 다른 서사를 꿰어도 좋으며, 혹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도 된다. 플롯도, 시놉시스도, 확정된 방향도 없다. 산포 한 이미지들이 잔여를 만들어내고, 그 잔여가 또 다른 잔상을 불러낸다.
전시장에 놓인 그림들은 때로 좌표가 되고, 때로 이정표가 되며, 때로는 무관한 자리로 남는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그것들은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게 하는 매개다. 이미지의 순서는 중요하지 않다. 흩어져 있던 점들이 촘촘히 연결될 때, 한 그림의 일부가 다른 그림의 모티프로 다시 떠오를 때—언어로는 말하지 않았던 관계들이 눈앞에 드러난다.
그래서 이 전시는 한편으로는 하나의 거대한 그림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보는 이의 생각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는 장(場)이다.
단정해 보이는 표면 아래로 조용하지만 분명히 스며드는 잔상들—그 침묵의 움직임을 따라가 보면 어떨까
이효연 개인전
스며들고 어긋나고 (Seep and Slip)
2025.10.22 Wed-11.4 Tue
아트필드 갤러리 3관
서울 영등포구 도림로 129길 2-1